자화상

                                                                         이근배

-너는 장학사(張學士)의 외손자요

이학자(李學者)의 손자라

머리맡에 애기책을 쌓아놓고 읽으시던

할머니 안동김씨는

 애비, 에미 품에서 떼어다 키우는

똥오줌 못 가리는  손자의 귀에

알아듣지 못하는 말씀을 못박아주셨다

내가 태여나기 전부터

나라 찾는 일 하겠다고

감옥을 드나들더니  광복이 되어서도

집에는 못 들어오는 아버지와

스승 면암(勉唵)의 뒤를 이어

조선 유림을 이끌던 장후재(張厚載)학사의

셋째 딸로  시집와서

지아비 옥바라지에 한숨 마를 날 없는 어머니는

내가 열 살이 되었을 때 

겨우 할아버지 댁으로 들어왔다

그제서야 처음 얼굴을 보게된 아버지는

한 해 남짓 뒤에 삼팔선이 터져

바삐 떠난 후 오늘토록 소식이 끊겨있다

애비 닮지 말고 사람 좀 되라고

-비례물시 非禮沕視 하며

 비례물청  非禮勿廳 하며

 비례물언 非禮勿言 하며

비례물동 非禮勿同  하며.....

율곡 栗谷의 격몽요결(擊蒙要訣)  을

 할아버지는 읽히셨으나

나는 예 아닌 것만 보고

예 아닌 것만 듣고

예 아닌 것만 말하고 

예 아닌 짓거리만 하며 살아왔다

글자를 읽을 줄도 모르고

붓을 잡을 줄 모르면서

지가 무슨 연벽묵치(硯壁墨癡)라고

벼루돌의 먹때를 씻는 일 따위에나

시간을 헛되이 흘려버리기도 하면서.

그러나 자다가도  문득 깨우고

길을 가다가도 울컥 치솟는 것은

- 저 놈은 즈이 애비를 꼭 닮았어!

할아버지가 자주 하시던 그 꾸지람

당신은 속 썩이는 큰아들이 미우셨겠지만

- 아니지요 저는 애비가 까마득히

올려다 보이거든요

칭찬보다 오히려 고마운 꾸중을 

끝내 따르지 못하고 나는 오늘도 

종아리를 걷고 회초리를 맞는다.

 

 

 

* 면암勉庵  : 최익현崔益鉉 의 호

  율곡 栗谷 : 이이李恆의 호

  연벽묵치 硯壁墨癡 : 문방사우에  빠지는 어리석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