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여름 세워진 이태준열사 기념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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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이씨의 32세손인 이태준(李泰俊) 열사는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독립운동가입니다.
이태준 열사는 1883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일부 기록에는 서울에서 태어났다고도 합니다) 1907년 2월 세브란스 의학과(연세대 의대의 전신)에 입학하고 1911년 6월 졸업해 의사의 길을 걷게 됩니다. 세브란스의 2회 졸업생 6명 중 한 명이었다고 하니 서양의 신문물을 받아들인 1세대에 해당됩니다.



[기념공원의 전경]




그는 아직 학생이던 1910년 운명적인 만남을 갖습니다. 고문 후유증으로 세브란스에 입원한 도산 안창호 선생을 치료하면서 그에게 민족애(民族愛)라는 세례를 받습니다. 그의 권유로 비밀학생 조직인 청년학우회에도 가입합니다.

1911년 10월 중국에서 신해(辛亥)혁명이 일어나자 크게 감동을 받은 그는 1912년 중국으로 망명, 남경의 기독회의원에서 인술을 펼치다가 만주를 거쳐 1914년 울란바타르(당시 지명은 우르가)까지 오게 됩니다.

독립운동의 열망에 들뜬 그에게 망명과 몽골행(行)을 권한 이는 사촌처남인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규식 선생은 미국으로 유학, 르녹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새문안 교회의 장로로 있으면서 광복 운동에 참여하다 중국으로 망명한 독립 투사입니다. 김규식 선생은 이 열사를 통해 몽골에 독립군을 양성하는 군관학교를 설립할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일본과 맞써 싸우는 몽골인들에게 큰 도움을 주게 됩니다. 당시 몽골은 외래 문명과 접촉하기 시작하면서 성병 등이 넓게 퍼져 국민건강이 큰 위협을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동의의국(同義醫局)이란 이름의 병원을 세우고 몽골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한 그는 몽골에서 신의(神醫)로 추앙받을 만큼 큰 신망을 얻게 됩니다. 몽골의 마지막 황제인 잡잔담바 보그트칸의 주치의 노릇도 겸한 그는 1919년 몽골의 최고 훈장(에르테닌오치르)도 받습니다. 그의 병원은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의 유통 경로이자 독립운동가들이 이동하면서 쉬어가는 거점이 됐다고 합니다.

이태준 열사는 1920년대 독립운동사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긴 의열단 소속이었습니다. 의혈단이라고도 부르던 의열단은 1919년 11월 김원봉이 만주 길림에서 12명의 동지와 함께 서로 혈맹으로 의열투쟁을 선언함으로써 발족됐습니다. 의열단의 정신은 단재 신채호가 기초한 의열단 항일선언문 ‘조선혁명선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강도 일본은 우리의 국호를 없애고 우리의 국권을 빼앗으며 우리 생존의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로 시작되는 이 선언문은 일제침략의 실상을 폭로하며 이같은 잔악한 일제를 한반도로부터 영원히 몰아내기 위해서는 강력한 힘으로 맞서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강력한 군사력만이 조선의 독립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의열단의 각성은 외교를 통한 국권회복을 시도했던 고종황제의 노력이 좌절된 것을 계기로 시작된 것입니다.

1920년 6월 밀양경찰서 폭파, 같은해 9월의 부산경찰서 폭파, 1921년 9월의 조선총독부 폭파, 1922년 3월 상해 황포탄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사살 미수, 1923년 김지섭 의사의 천황거소 폭탄 투척 등이 의열단의 활동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의열단의 투쟁은 1930년대에 이르러 김구가 결성한 비밀결사 ‘애국단’으로 이어져 이후 윤봉길, 이봉창 의사의 의거로 꽃을 피우고 있다고 역사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태준 열사는 독립운동 자금을 조성해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한편 헝거리 출신 폭탄제조 기술자 마자르를 섭외, 항일운동에 쓸 무기를 만들게 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 백군(白軍)과 전략적 제휴를 한 일제의 마수에 걸려들고 맙니다. 짜르 황제의 복위를 노리던 백군(황제군)과 일본군이 적군(赤軍)의 지원을 받는 몽골군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이에 앞서 몽골의 기마군단은 잠조차 서서 자는 말을 훈련시켜 풀숲에 눕게 만들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발굽에 옷감으로 신발을 신기는 등 치밀한 준비를 거쳐 기습작전으로 우리 독립군의 청산리전투에 버금가는 전투를 벌여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 한 바 있습니다. 그 반작용으로 일본은 몽골군을 공격하기 위한 양면 작전에 들어갑니다.

1921년 백계 러시아 장군 운게른수테른베르그의 부대와 일본군의 연합세력이 울란바타르의 몽골 항일부대 주력을 급습하는 과정에서 체포된 이 열사는 그해 38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울란바타르에서 큰 뜻을 펼친 지 7년만에 일어난 비극이었습니다.

몽골이 오랜동안 사회주의 국가로 머물러 있어 우리와 교류를 갖지 못한 탓에 이 열사의 행적은 늦게서야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정부에서는 1980년 광복절에야 겨우 건국공로포상을 수여해 그의 넋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울란바타르에서 처형됐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 그의 유해는 현재까지도 찾지 못했습니다. 몽골 정부는 그의 유해를 찾는 데 현상금을 걸어 놓고 있습니다.

이태준 열사의 기념공원 건립은 90년대 중반, 몽골에서 활동을 펼치던 연세대 의대 의료봉사단이 그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시작됐습니다. 2000년 3월 몽골정부가 2천여 평의 부지를 제공하고 연세대에서 비용을 내서 같은 해 7월 8일 묘비제막식을 가졌습니다.


[기념공원 입구의 조형물]


                    
추모공원에는 묘비와 이 열사의 행적을 알리는 간단한 조형물이 있을 뿐이지만 몽골 국민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고합니다. 아이들도 자주 놀러와 공원 안에서 뛰놀다 가곤 합니다. 제막식 이후 이곳 공원에는 지난해와 올 8월 ‘황사방지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네트워크(mongolia.simin.org) 회원들이 심은 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아직 숲을 이룰 정도는 아니지만 온통 풀 뿐인 몽골에서는 몇 그루의 나무조차 힘과 활기를 느낄 수 있는, 흔하지 않은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 황금찬 선생님과 한국시낭송가협회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