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無等)을 보며 /서정주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山)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손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午後)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작가 소개

서정주(徐廷柱 1915-2000) 시인. 전북 고창 출생. 호는 미당(未堂).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등단(1936). 1936년 불교전문 중퇴. <시인부락> 주간. 흔히 ‘생명파’ 혹은 ‘인생파’로 불림. 1948년 동아일보 사회․문화부장. 서라벌 예대․동국대 문리대 교수를 역임. 1972년 불교문학가협회장. 1976년 명예 문학박사(숙명여대). 1979년 한국문인협회 명예회장, 1979년 동국대 대학원 명예교수

주요 시집과 시 세계

<화사집>(1938) : 악마적이며 원색적인 시풍, 토속적 분위기를 바탕으로 인간의 원죄 (原罪)를 노래함.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고 그 운명적 업고(業苦)를 ‘문둥이’, ‘뱀’을 통해 울부짖었으며, 이후 미당은 ‘한국의 보들레르(프)’로 불림

<귀촉도>(1946), <서정주 시선>(1955) : 원숙한 자기 성찰과 달관을 통한 화해. 동양적 사상으로 접근하여 재생(再生)을 노래. 민족적 정조와 그 선율(旋律)을 읊음

<신라초>(1960) : 불교 사상에 관심을 보여 주로 불교국(佛敎國) 신라에서 시의 소재를 얻음. 선적(禪的)인 정서를 바탕으로 인간 구원을 시도하고 새로운 질서를 확립함

<동천>(1968) : <신라초> 시대보다 더 불교에 관심을 두고, 신비주의에 빠져드는 시기

<질마재 신화>(1975), <떠돌이의 시>(1976) : 토속적이며 주술적인 원시적 샤머니즘이 노래되며, 시의 형태도 산문시, 정형시로 바뀌게 됨


시어 풀이

남루 : 헌 누더기

갈매빛 : 짙은 초록빛

지란 : 영지와 난초

눙울쳐 : 기운을 잃고 풀이 꺾이어

쑥구렁 : 쑥이 자라는 험하고 깊은 구렁. 무덤




핵심 정리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낭만적. 전통적

심상 : 시각적. 후각적. 촉각적 심상

어조 : 설득적 어조. 긍정적 어조

표현 : 대유법. 의인법. 직유법

구성

   1,2연  자녀를 소중하고 품위 있게 기름

   3,4연  휴식을 취하는 부부의 모습

   5연   가난에 굴하지 않고 품위와 지조를 지킴

제재 : 가난(생활의 어려움)

주제 : 본질적 가치에 대한 긍지와 신념

출전 : <현대 공론>(1954)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전 5연으로 되어 있는 자유시이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삶이지만 그러한 삶에 만족하며 감사하며 사는 모습이 잘 그려진 시이다.

이 시의 각 연의 짜임을 보면 1연에서는 가난에도 흔들리지 않는 높은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엿볼 수 있으며 2연에서는 삶에 대한 의연하고 긍정적인 자세가 보인다. 3연에서는 삶의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려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으며 4연에서는 부부가 서로에 대해 갖는 따뜻한 사랑과 배려가 그려지고 있고 5연에는 삶의 어려움을 담담하게 수용하는 넉넉한 마음이 드러나 있다.

이 시의 창작 동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6.25 동란 후 몇 년인가를 시인은 광주에서 기거하며 조선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전쟁의 상처가 가시지 않아 그 당시 대학의 교수에 대한 처우는 말이 아닐 정도였다 한다. 내 남 없이 모두 궁핍하던 때인 만큼 점심을 굶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불가항력으로 일생에 처음 당하는 물질적 궁핍 속에서, 크고 의젓하고 언제나 변함없는 무등산을 보며 시인은 이 시를 썼다고 한다. 그는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선연히 서 있는 무등산의 모습에서 교훈을 찾고 있다. 인간의 참모습은 물질적 부족으로 인한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 속에서 정신적으로는 더욱 풍요로워지며 만족과 감사함이 깃든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아무리 가난해도 자식을 소중히 하고, 부부간에 서로 의지하고 믿음으로써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나아가서는 자기 삶의 현실을 ‘가시덤불 쑥구렁(죽음) 속에서도 옥돌같이 묻혀 있다.’는 정신적인 여유를 강하게 엿볼 수 있다.

이 시에서 가장 깊이 있게 살펴봐야 할 것은 ‘무등산’의 의미이다. 여기서의 무등산은 부모들이 지녀야 할 인내, 의연, 사랑을 보여 준다. 이러한 산의 모습은 물질적 궁핍, 육체적으로 피곤한 현실을 극복하고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