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기행>                                

     - 시낭송가협회당진지부설립--

                                               황 도 제




  김문중 시인의 휘하에서 이미 시낭송가로서 입지를 구축하고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김명회 예비 시인이 구축한 시낭송가협회 전국지부 1호 당진 시낭송협회 설립을 위하여 12月26日 오전 9시 광진 문화원에서 전용버스(?)를 타고 당진을 떠났습니다. 연말이며 크리스마스가 지난 다음 날이어서 그런지 버스 속엔 약간의 자리가 남았고, 덕분에 편안하게 여행길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조릿조릿했던 마음은 안개 걷히듯 벗겨졌지만  허출한 배는 벌충을 요하고, 아무도 대서지않는 시간은 무심히 9시를 넘기고 - - -

목소리 고운 아나운서 박상경 시인이 출발시간보다 늦게 도착하여선 갑자기 녹음 스케줄이 잡혀서 동행을 못하고 뒤늦게 행사에 합류하겠다고 하여 김문중 대표를 당황케 하던 모습이클로즈업 되고, 기다리는 분, 급히 오시는 분 서로 서로 오버 랩 되고,- - -  아버지(황금찬)께선 오전 8시 40분까지 맞춰 오시느라 버스와 전철을 바꿔 타시며 부지런히 길을 재촉하셨지만 전철 안이 아침출근 시간과 맞물려 콩나물시루 같아 아마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으셨던 모양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끄덕 없으셨을 텐데 - --  그래서 앞으로는 이른 시간에 출발해야 하는 행사는 불참하시겠다는 으름장을 놓으시기도 하셨는데, 아버지와 반대방향에 살고 있는 아들로선 그저 죄송스럽기 그지없었을 뿐입니다.

  전용 기사님은 합창단원과 낭송가와 시인들의 안전을 책임진 탓인지 모범적인 운전으로 도로위로 달렸습니다. 쾌적한 상태는 계속되었습니다.

김명회씨는 당진에서 서울 광진문화원까지 일주일에 4회 시 창작, 시낭송. 합창. 논술강의를 들으러 강행군을 하는 열성적인 신념의 시낭송가로서 당진에선 없어서 안 될 중추적인 인물로 자리매김 되어있는 존재인데,  재색을 겸비한 그미는 시낭송가협회 지부설립을 빌미 삼아 연말여행까지를 선물로 안겨주었던 것입니다.

당진 문화원 근처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고 문화원으로 자리를 옮겨 당진의 선진화와 복지혜택을 위하여 고군분투하시는 높은 책임자들 앞에서 시낭송가협회의 기본실력인 시낭송, 합창, 고전무용등을 펼쳐 보임으로써 즐거운 시간임은 물론 시낭송가협회지부 발족식까지 성대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중심인물인 김명회씨의 내빈소개와 외조자, 친정식구. 시댁식구들 소개는 아주 재치 있는 순발력으로 앞으로의 시낭송가 협회가 순항할 것이라는 예고를 돋보이게 했으며, 별도로 사회자 박상경 시인의 기습공격인 미모의 문화원장에 대한 시낭독 요청은 아름다운 순간포착의 백미였는데, 실은 아주 멋진 배려를 간접화법으로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순조롭게 프로그램이 끝나고 무수한 꽃다발과 화환과 격려 메시지 - -

성대한 자리였습니다. 모두 흡족한 모습이었습니다.

  눈부신 가을 햇살 같은 겨울 햇빛을 받으며 현판식 촬영과 기념 촬영이 이어지고, 사진 찍기는 계속되고 - - 모두들 멋진 모습 드러내려 바쁘고 - - -

사진기가 지칠 무렵 일몰광경의 명승지로 이름 나 있는 왜목마을로 자리를 옮겨 장엄한 해넘이를 보았습니다. - 지는 해를 바라보며 추하고 탁하고 더러운 것들을 다 지우셨는지, 돌아오는 모습은 맑고 깨끗했습니다. 저녁은 한창 구뿌던 때라, 바다가 한 뼘 거리에 위치한 식당에서 즐겁게 성찬식에 오른 생선들로 맛있게 해결했습니다.

약간의 음주가 곁들여진 후 재치 있는 고경자 시인의 사회로 노래도 하고 시낭송도 하며 여흥을 즐겼고 이어서 반성과 미래의 소망이나 계획을 발표하는 고백의식을 촛불아래에서 거행했습니다. 아버지의 대표작 중 하나인 시 ‘촛불’이 낭송되고 이어서 한 분 한 분 순서를 바꿔가며 가슴 속 감정을 꽃피우기 시작했습니다. 방안엔 불꽃이 수놓아지며 바다의 물결과 함께 출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한해를 보내는 경건함이 가슴속에서 지평과 수평을 넓혀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아마 지평과 수평이 맞닿은 곳에서 가뭇이 사라졌다가 돌아오신 분들도 계실 것이고 흐뭇한 미소를 지은 분도 계셨을 것입니다.

  밤이 깊어지고 저 만큼의 바닷물이 이 만큼으로 다가섰을 때 서로 따스한 동지애를 느끼며 기쁨의 절정을 바닷가로 내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해변의 낭만을 맛보기 위해서입니다. 겨울의 파도는 시간을 적시고 젖은 시간은 당진의 밤을 물들였습니다.


  아침 일찍 해돋이를 보러 갔으나 날이 흐려서 일출은 못보고 그냥 돌아왔습니다. 하늘에 계신 그 분은 한 번에  두 가지의 선물을 주시지 않은가 봅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순종해야 하니까요. 조식 후에는 시낭송가협회에 대한 상고와 전망을 진지하게 논의 했습니다. 전국규모 1호 당진지부 설립에 따르는 중차대한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에 점을 찍은 후에는 필경사(筆耕舍 : 상록수의 저자 심훈의 집필실)에 들러 한 시대를 풍미한 문인의 모습을 반추했습니다. 특히, 어제(26日) 점심식사 시 당진문화원장과 나눈 아버지의 재미있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심훈 수필집 ‘7월의 바다’ 마지막 구절입니다

“석조에 타는 허공에 막걸리 사발을 높이 들었다.”

노인이 안고 있는 손자를 보며 독백처럼 흘린 구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문장입니다.

상당히 시적인 내용이라는 말씀과 더불어 그 수필 속에 등장하는 가치네(갇히네)섬이 어딘지 모르겠다는 말씀 등등.

  그 궁금한 것이 이 곳 에 와서야 다 풀렸습니다. 그 가치네 섬은 지금의 행담도 (서해대교 중간에 있는 휴게소가 있는 섬)을 말하는 것으로 밀물이 들어오면 육지로 나갈 수 없게 갇히고 썰물이 되면 육지로 갈 수 있다 하여 ‘가치네’라고 불린다는 사실. 그리고 필경사가 지도상으로 보아도 서해대교를 지나 당진으로 들어오면 그 초입 우측에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심훈’은 그 가치네 섬을 자주 갔거나 아니면 상당히 의미 있는 섬으로 해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가치네섬을 왜 행담도라 부르는가. 그것은 조선시대 때 나그네가 배를 타고 과거시험 보러가는 도중 배가 전복하여 가치네섬으로 떠밀려가 목숨을 겨우 건졌으나 문제는 식수걱정이었답니다. 그런데 하늘의 도움이신지 그 섬의 물은 단맛이 돌며 시원하였답니다. 그래서 살아난 그 행인은 기운을 차려 목적지 한양에 무사히 도착했고 이어서 장원급제 하였답니다. 그 후 행인은 맑은 물이 나오는 섬이라 하여 행담도(行淡島)라 불렀답니다.

  이런 사실은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였는데 이번 여행길에서 찾아낸 소중한 자료인 셈입니다. 시낭송가협회의 여행 때문에 얻은 큰 수확인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런 모임에는 빠지면 안 된다는 사실 또한 명심해야 합니다.

오후쯤 중간엔 김대건 신부의 기념관에서 그분의 발자취를 보았고 박해와 순교의 상관관계도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후의 햇빛은 참으로 급한가 봅니다. 자꾸 시간을 서두르더군요. 당진의 햇빛은 조금씩 빠져나가고  서울 햇빛이 밀려들기 시작하자 차는 귀경길이 바쁘다는 듯 당진을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당진 쌀 한 포대(군에서 주신 것) 호박고구마 한 상자, 왜목마을의 해넘이 사진등 한 보따리를 당진의 선물로 받은 나는 낑낑거리며 서울로 가는 도중에 먼저 내렸습니다. 사는 곳이 서울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끝까지 못가고- ---

  수고한 분들이 너무 많아 그 분들이 이름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들 자신의 이름이 오르지 않았다하여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만 고생을 많이 하신 몇몇 분의 이름을 그냥 지나치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올린 것입니다. 해량하시고 당진의 좋은 기억을 가슴에 담기 바랍니다.

언제나 집을 떠나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끝으로 광진에서 당진으로,  넓은 나루에서 당나루로 - - 강의 나루에서 바다의 나루로 참 기이한 인연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