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백양문학 시낭송 게시]

배추 서리 / 이 강 수

                
눈이 소복이 내렸다.

차량출입이 금지된 아스팔트 위에만 소복이 쌓여있다. 많은 양의 눈은 아니지만 밟히는 촉감이 좋다. 제법 뽀드득 소리가 난다. 무등산 아침공기가 상큼하다. 동행한 여류 시인들은 소녀같이 노래를 부른다. 한국시낭송가협회 김문중 회장이 황금찬 시인의「산길」을 선창한다. 이어서 안초운 시인이 성기조 시인의 「사랑은 바람」을 부르고, 황순남 시인이 김후란 시인의 「숲속 오솔길」을 선창하면 코러스대로 아름다운 노래가 싸한 공기를 타고 무등산을 감싸 돈다. 위용을 자랑하는 노송은 조용히 듣고만 있다. 푸르디푸른 시눗대는 서로를 비벼대며 박수를 보내고 있다. 질세라 누런 잎을 매단 상수리나무도 응답한다. 왜 상수리나무는 쓸모 없이 말라비틀어진 나뭇잎을 매달고 소란을 떠는지 모르겠다.


오름을 계속 하여 숨이 가쁠 때쯤 되니 석간수 가있다. 한 모금 마시니 오장육부가 시원타 못해 한기를 느낀다. 오르는가하면 내리막이 있고, 한 구비 돌아가면 또 한 구비가 있다. 시야가 확 트이는가하면 청솔밭을 지나기도 한다. 맑은 하늘엔 흰 구름 한 점이 한가롭다. 로프를 의지하고 나무 계단을 내려오는데, 양복에 넥타이와 구두까지 갖춘 정장 차림을 한 나를 원색의 등산객들은 이상한 눈으로 처다 본다. 어제 무등파크호텔에서 정건철 시인의 시집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다가 여인들의 성화에 못 이겨 아침 일찍 무등산엘 오르게 되었으니 등산복을 갖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산 길에 맛본 무등산 막걸리와 김치부침, 녹차국수는 일품이었다. 옥에 티라면 무등산 여기저기에 들어선 묘지가 눈에 거슬렸다. 명산에 조상을 모시면서 만대까지 부귀영화를 누리겠다는 그 심보가 밉상스러웠다. 낙락장송 솔밭 속에 거만하게 버티고 있는 호사스런 묘는 더욱 얄미웠다. 수많은 등산객으로부터 한마디씩 덕담 아닌 악담(?)을 들을 테니 그곳에 묻힌 조상의 심기가 편치만은 않을 것이요, 그 후손들이 잘 될지 심히 의심스럽기만 한다. 그리고 등산로 입구에 즐비한 음식점에서 배출하는 생활오수와 화장실의 오물이 정화 과정 없이 하천으로 방류되는 것은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주민이나 관계당국은 철저한 관심을 가져야 겠다.


지리산 가는 길에 길을 잘못 잡아 순창 톨게이트에서 U턴을 했다. 고속도로 통행권을 분실하여 정건철 시인이 해결 한 후 지리산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창 밖을 보니 배추밭에 검푸르게 얼은 배추가 뽑히지 않은 채 그래도 방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농민들의 아픔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김문중 시인이 살짝 얼은 배추 속잎을 쌈장에 찍어먹으면 천하 일미라고 하니 이구동성으로 옳은 말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그만 그 배추밭을 지나치고 말았으니 모두 입맛만 다시고 말았다. 지리산 가족 호텔엔 한상기 교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무등산에서 준비해온 김치부침과 무등산 막걸리로 그의 환갑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보내드리고 우리일행은 지리산 정상을 향해 차를 몰았다. 굽이굽이를 돌아 지리산 정상 노고단 주차장에 도착했다. 노고단 등산은 추위 관계로 포기하고 따끈한 우동 한 그릇으로 시장 끼를 때우고 하산하는데, 예의 그 노란 배추 속 에 군침이 돌아 배추 서리를 하기로 작심을 하고는 순창 쪽을 향해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일곱 명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배추밭을 찾았으나 가도가도 보이지 않아 그만 포기하고 허전한 마음으로 돌아서고 말았다. 모두 아쉬움이 가득한 상태인데 고순복 시인이 갑자기 스톱! 을 외쳤다. 길옆에 배추가 있었다. 고순복 시인이 가드레일을 넘어 간선도로를 넘고 밭으로 내려가는 순간 김문중 회장과 정건철 회장도 배추밭으로 돌진하면서 축구 선수 마냥 발로 냅다 차니 배추가 힘없이 뽑혀 나둥 그려진다. 세 사람이 뽑은 배추를 삽시간에 한아름 안고는 차에 싣고 줄행랑을 쳤다. 농민이 포기한 배추지만 나는 들킬까봐 조바심을 하면서 그만하고 가자고 소리 소리를 치고, 모두는 짜릿한 스릴과 통쾌함으로 박장 대소를 하면서 고속도로를 벗어나 지리산 호텔 쪽으로 접어들었다. 호텔에서는 쓰레기가 많이 나와 다듬을 수 는 없으니, 한적한 곳에서 깨끗이 다듬어 가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되었다. 길옆에 차를 세우고 깨끗이 다듬고 보니 속이 노란 것이 제법 상품(?)이 훌륭했다. 잘 다듬어 비닐 봉지에 넣고는 의기 양양하게 509호실로 들어갔다. 따끈한 밥에 김순복 시인의 솜씨 좋은 쌈장과 김치찌개, 달콤한 배추 속이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유년시절의 동심을 떠올리며 참외서리, 오이 서리, 복숭아.사과 서리, 닭서리, 콩 서리, 밀 서리 등의 무용담이 끝도 없이 나온다. 그러나 엄동 설한에 배추 서리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 아닌가? 이제 겨울 배추 서리는 처음이자 마지막일 테니까 늙으막에 아름다운 추억이 되기에 충분하다. 지리산의 밤은 서서히 깊어간다. 창 밖을 내다보니 정원의 나무에 매달은 꼬마전구의 불빛이 휘황 찬란하다. 새벽 두 시에 서울로 출발하는 차 속에서 어제의 배추 서리가 또 한 번 화제로 올랐다. 밖은 올 들어 제일 춥다는 영하 11도다. 체감 온도는 20도라고 하는데, 차 속은 노란 배추 속같이 봄기운이 돈다.  어제의 치기 어린 배추 서리 가 혹 배추 주인에게 폐가 됐다면 용서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