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게

성백원

십 년 걸려
한 권의 책을 묶고
차일암 세초연에 앉았으니
붓 백 필이 날아간 곳도
복숭아 뼈가 달아 사라진 것도
알 수가 없구나
비 온 뒤의 거문고 소리
물결인 듯 꿈결인 듯
흐르는 눈물로 지나간 세월을 씻는다
왜놈이 쳐들어 와
불바다가 되어 갈 때
전주유생 손홍록과 안의는
수 백 권의 실록을 지게로 날라
깊고 푸른 동굴 속에 감춰 두고
삼 백 예순 닷새를 뜬 눈으로 지켰다
이들이 아니라면 사라지고 말았을 조선왕조실록이
세계 기록 유산이 되어 빛을 발하고 있으니
역사를 짓는 것은 벼슬이나
그것을 지키는 것은 지게를 짊어진
이 땅의 선비들이다
유장한 강줄기가 삶의 젓줄이라면
유구한 역사는 삶의 뿌리인 것을 아는 자만이
그늘 깊은 나무를 가꿀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