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진 선생님을 뵙고


수필 / 주현중



2004년 4월도 어느덧 고별을 준비할 무렵 4월25일 서울의 창공은 맑고 맑았다. 먹구름 한점 없는 하늘은 마치 천지개벽이 일어난 후 새 세상을 열어 세계전도를 바꾸어 놓지는 않았나 싶을 정도로 가을하늘보다도 더 높고 청명한 하늘이었다. 필자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탄성을 내질러 보았다. “거참 별일이야!”

필자가 시인이라는 공식 칭호를 얻고부터 시 창작 공부도 아직 멀었건만 시낭송 연습을 해본답시고 서울에 소재한 백양문학회 시낭송회 회원의 일원으로 매월마다 한번씩 참석을 하는 4월25일도 그날이었다. 백양문학회 단골 원로시인님이신 황금찬 선생님이 고문으로 계셔서 그저 매번 마주 앉아 식후 점심식사를 함께하는 기쁨만으로도 행복이다. 그런데, 이번엔 꿈에도 생각지 못한 구전으로 아니면 언론매체를 통해 이름만 들어보던 분. 이생진 선생님을 시낭송회에서 뵙게 되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었다. 새내기 문인에게 있어 원로문인 선생님들과 밥상머리에 마주 앉아 담소를 즐긴다는 것이 그리 흔한 일은 아닐 게다. “정말 봄 햇살도 눈부신 째지게 기분 좋은 날에...”

필자는 스스로에게 “야! 현중이 너 문인 되길 잘 했지?” 되묻곤 피식하고 미소 한 모금을 물어 보았다. “학창시절 국어교과서에서 함자도 드높은 시인님, 수필가님, 소설가님을 꿈엔들 만날 수 있겠어? 피식! 이젠 너도 수필가 시인이잖아.” 왜 그런지 대통령님의 용안을 직접 보았다 한들 이렇게 기쁠 수가 있을까 싶었다. 여기서 잠시 현직 노무현 대통령님을 과거 평화민주당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찬조연설을 하는 모습을 서울 청량리역 앞 광장에서 한번 뵌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땐 이렇게 기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황금찬 선생님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이생진 선생님을 더 뵙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다. 잘은 모르지만 너도 나도 라는 문학파 독자님들이 필자를 보기만 하면 이생진 선생님을 아냐고 자주 묻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어 이름만 알아. 나도 한번 뵈었으면 좋겠는데...”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소만 흘렸다. 간절히 바라면 소망이 이루어진다던가?

백양문학 시낭송회는 봄꽃처럼 밖으로 삐죽 나가고 싶었는지 서울 광진구 테크노피아 9층 하늘공원이라는 야외 공원에서 한다는 개인시집 “나도 저 창 밖에”를 출판한 황순남 시인님의 전갈이 사전에 있었지만 4월25일 월요일 행사장에서 이생진 선생님을 뵙게 되니 날개라도 있다면 날고 싶은 지경이었다. 배경도 좋은 가끔씩 한강 물이 바람결에 뺨에 애무를 하며 지나가는...

행사는 무르익어 각자 개성을 담은 목소리로 한 얼굴 두 얼굴이 무대를 올랐다 내려가기를 몇 차례... 사회자의 소개에 따라 이생진 선생님의 문학 강연의 순서로 이어졌다. 문학 강연이라기에 다소 지루하지는 않을까 했는데 괜한 생각을 한다는 듯이 역전되었다. 시의 발로는 기생이었다는 말씀으로 전개되며 황진이, 이매창, 논개라는 조선시대 때 둘째가라면 서럽다는 명기들의 활약상과 인품과 절개에 대해 그리고 시와 가락은 떨어질 수가 없다는 시음(詩吟)에 대해 그리고 문인의 비애(悲哀)에 대해 재치와 순발력으로 열띤 강연을 하셨다. 강연 중에 황진이를 짝사랑하다 죽은 옆집의 한 서생(書生)의 상여가 황진이의 집 앞에서 멈춘 일이 있었는데 그 까닭이 황진이을 사모하다 원을 못 풀고 죽은 한이니 입고 있는 속옷이라도 벗어줘야 상여가 길을 떠난다는 서생의 동료의 말을 전해들은 황진이가 부끄러움을 감수하며 옷을 벗어 주니 그제야 상여가 길을 갔다는 이야기를 하시며 손수 준비해 오신 미니 카세트로 상여가 행차할 때 하는 이름하여 상여소리를 틀어가며 황진이가 자신을 사모하다 죽은 서생의 명복을 기리며 지은 시 한수를 읊으셨는데 이생진 선생님의 몸짓이 어쩌면 필자가 어릴 적 친할머니가 정선 아리랑을 부르며 춤을 추던 모습과 닮았는지 친할머니 생각이 불쑥 나기도 하였다. 여기서 잠시 조선 최대의 기녀 황진이가 우리민족의 시음(詩吟)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남기고 갔는가를 짚어보며 장두익 작사 조용필 작곡의 황진이라는 노래를 소개해 본다.

“황진이”

내가 부르면 내가 부르면 잔잡아 권하실 서러운 님
내가 부르면 내가 부르면 춘풍을 베어내실 님
청산의 벽계수는 수이 가구요 서리서리 한 세월은 속절없지요
왜 생겼오 인생연분 왜 생겼오 세상별리
어즈버 어즈버 청초에 백골만 남을 님
그대는 황진이 내 사랑 황진이 내 사랑 황진이
잔을 치고 북을 치고 한 맺히고 한 맺힌 인생을 치고
살풀이에 장고 춤이 못다 한 사랑을 치고
헤라 헤라 꽃이 피고 나비 있구요 어저어저 나비 있고 양귀비지요
왜생겼오 왜 생겼오 견우직년 금침원앙
이시랴 이시랴면 한 허리를 둘에 내실 님
그대는 황진이 내 사랑 황진이 내 사랑 황진이

기생을 흔히 술잔이나 기울이고 몸이나 파는 여인으로 연상이 되지만 기실은 조선시대의 기생은 오늘 날의 창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으리만치 풍부한 지식과 학문과 절개를 지녔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다시금 새기게 되었다. 이생진 선생님말씀처럼 현시대에 조선 기생과 같은 절세가인이 있다면 시문이 절로 술술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잠기게 되었고 조선 기생에 대한 잘 못된 편견을 재조명하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현시대에는 창녀만 있고 기생은 없다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된 아주 좋은 강연이었으며 역시 문인은 가락이 없으면 참된 문인이라고 생각하며 시, 음, 주(詩, 吟, 酒)가 남녀의 속궁합처럼 잘 어울러져야 멋지고 아름다운 시문이 탄생되지 않을까!

끝으로 황진이는 능동적인 성격의 소유자이고 이매창(계생이라고도 함)은 피동적인 성격의 소유자라고 알려지고 있다. 황진이와 이매창의 시조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절창 한 수를 소개해 본다.

☞ 황진이의 시조
    
동짓달 기나긴 밤에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님 오신날 밤이면 구비구비 펴리라"

☞ 이매창의 시조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離別)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는지
천리(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