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궁전

왜병이 바다 건너 선조가 몽진(蒙塵) 떠난
한성부로 오기까지 스무 날이 걸렸다
수정된 실록에는 난민이 앞장서서
장예원의 노적을 불 지르고
쌀과 보물을 약탈했다 전하고
경성부사(京城府史)에도 그리 써있다만
정작 종군 왜승 제타쿠(釋是琢)의 조선일기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전각과 돌사자의 장엄함이며
서까래와 보마다 그려진 오색 팔채가 보인다
표정까지 잡아낸 사관의 기록이 아니라면
조선 하층민을 방화범으로 만든 기록은
몽진 떠난 4월 30일 억수로 쏟아진 비를 보고
5월 3일 입성한 일본의 이야기를 통해 새로 써야 하느니
입으로는 일제를 탓하면서도
제 나라 역사조차 바로 잡을 줄 모르니
이 어찌 안타깝지 않으랴
드므가 말을 하면 알 수도 있으련만
아직은 때가 아닌지 침묵하고 있구나

* 몽진 :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김
* 장예원 : 조선시대 노비의 부적(簿籍)과 소송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정3품 관청
* 드므 : 넓적하게 생긴 큰 독으로 궁궐 전각의 화재를 막기 위해 전각 월대 끝에 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