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밤
                    시. 이기철
                            

나는 나뭇잎 지는 가을밤을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에는 때로 슬픔이 묻어 있지만
슬픔은 나를 추억의 정거장으로 데리고 가는 힘이 있다.

나는 가을밤 으스름의 목화밭을 사랑한다.

목화밭에가서, 참다참다 끝내 참을 수 없어 터트린
울음 같은 목화송이를 바라보며 저것이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것임을 생각하고 저것이 세상에서 제일
보드랍고 이쁜 것임을 생각하고 토끼보다 더 사랑스러운
그 야들야들한 목화송이를 만지며, 만지며 내가 까 아만
어둠 속으로 잠기어 가던 가을 저녁을 사랑한다.
그땐 머리위에 일찍 뜬 별이 듣고 먼 산 오리나무 숲속에선
비둘기가 구구구 울었다

이미 마굿간에 든 소와 마당귀에 서 있는 염소를 또 나는
사랑한다. 나락을 심어 나르느라 발톱이 찢겨진 소
거친 풀 센 여물에도 좋아라 다가서던
툭툭 땅을 차고 일어서서 센 혓바닥으로 송아지를
핥을 때마다 혀의 힘에 못 이겨 비틀거리던 송아지를
나는 사랑한다 나는 일하는 소를 일하다가 발톱이 찢겨진 소를 사랑한다.

이미 단풍나무 끝에 가볍고 파 아란 짚을 매달고 겨울잠에
들어간 가을벌레를 나는 사랑한다.
그 집은 생각만 해도 얼마나 따뜻한가
수염을 곧추세우고 햇빛을 즐기며 풀숲을 누비던
여치와 버마제비를 섬들의 이른 잠을 깨우며
서릿밤을 울던 귀뚜라미를 나는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