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시인 황금찬과의 대화

 

이산

 

이 글은 2006625, 황금찬 선생님을 모시고 대전 행사에 다녀오면서 나누었던 대화와 이후 2주 후에 황금찬 선생님을 다시 만나 나누었던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사적인 내용은 빼고 주로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하였다. 그해 89세이셨던 선생님과의 대화는 문학에 대하여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이산>

선생님! 시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나요? 제가 알기로는 고대 그리스에 사포라는 여류시인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황금찬>

시는 인간이 말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생긴 겁니다. 창세기를 보세요. ‘태초에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 하시다.’ 얼마나 멋진 시인가요. 성경은 최초의 시집이라고 할 수 있어요. 어린아이가 처음 말하는 것이 그게 시입니다. 시를 쓰는 것이 참 어려워요. 그렇지만 쓰고 나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어요. 때로는 써 놓고 부끄럽기도 하지만요. 그래도 행복해요. 시를 쓸 때는 기도하는 것 같아요. 평안하거든요. 그럼요. 시를 쓰는 것은 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겁니다.

누군가 괴테에게 시가 뭐냐고 물었더니 괴테가 답변하기를 시를 모르는 사람은 야만인이다라고 말했다고 해요. 시는 양심입니다. 그리고 너무 시를 잘 쓰겠다고 하지 말아요. 괴테세계적인 시를 쓴다고 하지 마라. 자기의 조국을 위해서 시를 써라. 그게 곧 세계적인 시다.’ 자신의 나라, 고향을 쓰라는 거죠. 자신의 시를 쓰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세계적인 명시가 된다는 거죠. 괴테의 이야기를 좀 더 할까요. 괴테가 젊었을 때 등산객을 따라 알프스에 갔을 때 저녁의 아름다움에 취해 시 한 수를 어느 집에 써 놓았대요. 그리고 노인이 되어 다시 그곳을 찾았을 때 자기가 쓴 시를 보고 큰 소리로 말했다고 해요. ‘나는 시를 잃어버리고 인생을 찾았다.’ 젊었을 때 쓴 시가 진짜 자신의 시라는 거죠. 시는 순수한 겁니다. 괴테가 어느 온천장에 들렀을 때 19살 먹은 아가씨에게 홀딱 반해서 그 아가씨 할아버지에게 그 처녀를 아내로 달라고 했다고 해요. 그때에는 괴테가 온 유럽에서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을 때입니다. 괴테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때였지요. 처녀의 할아버지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어요. 내 딸에게 말해보세요.’ 그래서 처녀의 어머니에게 똑같이 간청하니 좋아요. 그런데 내 딸이 당신에게 시집가면 얼마 안 있어 과부가 될 터인데 어떻게 줄 수가 있어요.’ 괴테는 실망하고 마차를 타고 오면서 28127행의 장시를 썼어요. 정말 대단하지요. 나이가 들었어도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보고 용기 있게 아내로 삼으려고 한 괴테! 대단해요.

 

<이산>

선생님! 요즘 산문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춘문예도 산문시가 아니면 당선되기 힘든 것 같고요. 제 생각으로는 시는 행간의 공간을 두어야만 독자와 저자와의 소통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시는 소통되어야만 살아 있는 시가 아닐까요? 선생님께서는 산문시를 어떻게 보시나요?

 

<황금찬>

그렇게 하면 안 되지요. 정원에 여러 꽃이 있는 것이 장미만 있는 정원보다 아름답겠지만, 시의 맛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시는 시각적인 면, 청각적인 면, 상징적인 면 이 세 가지를 고루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의 시는 완전히 풀어 놓았어요. 그건 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지금의 산문시로 경도되는 경향은 일종의 유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는 유행을 타서는 안 되지요. 내가 신춘문예를 심사할 때는 산문시는 모두 제외했어요. 요즘은 신춘문예에 당선되기 위해서 산문시를 별도로 공부한다고 하더군요. 생각을 잘못 하고 있어요. 시는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 선과 악, 무엇인가 여운을 줄 수 있는 시적 사상이 필요합니다. 시의 깊은 뜻을 알려면 그 사람의 걸어가는 모습뿐만 아니라 발자국도 같이 보라는 말이 있어요. 시인의 마음까지도 보라는 이야기지요. 행간의 미학을 잘 표현한 시인은 박용래입니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나하고는 아주 친하게 지냈지요.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은 강경상업학교를 졸업했어요. 옛날 상업학교는 A, B, C급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강경 상고는 그중 A급이었어요. 박용래는 강경 상고를 수석으로 졸업했어요. 그때는 A급 상고 수석 졸업생들은 조선은행에 특채로 입행할 수 있었지요. 박용래는 시를 쓰려고 은행을 그만두고 중학교 선생으로 있었는데 5.16쿠테타 후 군사정권에서 교원자격증이 없는 교사를 내몰았어요. 그래서 쫓겨났어요. 부인이 산파를 해서 겨우 먹고 살았어요. 사람은 누구나 직장이 있어야 해요. 직장이 없으면 자유가 없습니다. 먹고 살기 힘들면 힘이 없어요. 수필가, 소설가, 화가 등은 로 끝나 직업으로 인식되지만, 시인은 아니지요. 별도로 살 궁리를 해야 하거든요. 그만큼 시인은 힘든 겁니다. 박용래는 술만 마시면 울어요. 한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제가 술도 많이 사주었지요. 언제든가. 한 번은 가람 이병기의 시비 제막식에 참석하러 전주에 갔을 때였어요. 우리는 밤새워 술을 마셨어요. 새벽에 집에 가려는데 박용래가 울면서 술 한 병만 더 사달라고 하는 거예요. ‘황사백, 나 이거 없으면 죽어요. 한 병 가지고 가야 해요참으로 가련한 사람이었어요. 불쌍하죠. 그 사람 그러다 1980년에 죽었어요.

내가 박용래 시인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200511월이었다. 그해 9월에 모 계간지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는데 그 사실이 사보에 났었다. 그걸 보시고 퇴임하신 문학모 전 금통위원님이 전화를 걸어왔다. 태백에 있을 때의 일이다. 내 시가 너무 좋다고 하시면서 나중에 시집 나오면 꼭 사보겠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박용래 시인 이야기를 꺼내시는 것이었다. 내 시가 박용래의 시와 비슷하다고 하셨다. 처음으로 박용래 시인이름을 듣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박용래 시인은 우리나라 시단에 한 획을 그으신 분이었다. 나는 지금 전설처럼 옛이야기로만 접하던 박용래 시인과 가깝게 지내셨던 황금찬 선생님을 통해서 그분의 삶을 전해 듣고 있는 것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간 느낌이다.

 

<황금찬>

아까 행사에서 내 시로 가요를 작곡하여 부르던 사람 말이에요. ! 여러 사람 앞에서 나를 배려해서 부르다고 하는 것 같아 그냥 있었지만 몰지각한 사람이에요. 시를 가요로 작곡하는 것은 좋지 않아요. 멜로디가 맞지 않으면 시를 망치는 거예요. 1985년도인가. MBC 대학가요제에서 입상한 곡이 있었어요. ‘저 바다에 누워~’라고.

 

선생님은 제목을 말씀하시면서 노래를 부르신다.

 

<황금찬>

그런데 노래의 가사는 대구에 있는 박해수 시인의 시였어요. 박 시인이 화가 나서 고발하겠다고 했지요. 허락도 없이 무단으로 이용했다고. 그 때 두 사람(높은음자리)이 그 노래를 부른 것 같던데 난리가 났지요. 매일 박 시인을 찾아와 용서해달라고 했어요. 나중에 견디다 못해 박 시인이 그럼 황금찬 선생님께 가서 괜찮다는 허락을 받아오면 용서해 주겠소라고 말을 했다고 해요. 나 참! 박 시인은 내가 시인으로 추천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 같았어요. 나는 시를 가요로 작곡하는 걸 아주 싫어해요. 가곡이라면 몰라도. 아무튼 그 사람들이 이번에는 나를 찾아 계속 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알겠소. 가서 내가 괜찮다고 하더라고 전해주시오라고 말했지요.

 

옛날에 김억이라는 시인이 있었어요. 친구 부탁으로 가요 가사를 써 주고 5원을 받은 적이 있어요. 그때 냉면이 5전 했으니 지금 환산하면 30만 원 정도 받은 것 같아요. 제자들이 그것을 얼마나 받고 가사를 써주었냐고 좀 뭐라고 그랬나 봐요. 하도 뭐라고 해서 실토를 했다지요. 친구가 하도 졸라대어서 5원 받고 써 주었다고. 동요 작가 윤석중도 가요 가사를 쓴 적 있어요. ‘봄나들이라고 이난영이 불렀지요. 나중에 왜 가요 가사를 써주었느냐고 했더니 부끄러워하면서 어떻게 알았어.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지 마라고 하는 거예요. 시인들은 자기 시를 가요로 만드는 것을 좋아 할 것 없어요. 부끄러운 일이지요. 시가 죽어요. 시로 가요를 작곡하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문화를 좀 먹는 사람들이에요.

 

<이산>

선생님은 수십 년간 시를 써 오셨는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소재를 잡을 수 있었는지요. 시 쓰기가 어렵던데요. 시를 쓴 다음 퇴고는 자주 안 하시나요?

 

<황금찬>

시가 제일 어렵지요. 시는 소설보다 더 많은 상상력이 필요해요. 최고죠. 그렇지만 잘 써야만 최고죠. 형편없는 시를 최고로 할 수는 없지요. 처음 느꼈을 때 쓰는 시는 시가 안 됩니다. 즉흥시는 좀 그러네요. 저는 보통 시 한 편 쓰는데 원고지 40매를 사용해요. 끊임없이 퇴고해서 한 편의 시를 씁니다. 내가 아는 시인 중에 퇴고를 안 하는 시인이 둘 있어요. 하나는 조병화이고 또 하나는 정지용이죠. 조병화는 퇴고를 안 해서 말을 좀 들었어요. 정지용 시인은 다르죠. 머릿속으로 수없이 퇴고해서 써내요. 천재지요. 시를 완전히 외어서 퇴고하거든요. 시를 잘 쓰려면 독서를 많이 해야 해요. 시집도 안 읽고 독서도 안

하고 시를 쓴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이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시를 쓰기 위한 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칼은 독서와 오랜 생각을 통해서 연마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황금찬>

맞아요. 그런데 칼을 갈다 말면 녹이 스는 법이에요. 그러니깐 완전히 갈아야 하죠. 설 갈면 녹만 슬게 되죠. 독서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초창기 문예지 문장1938년에 나왔어요. 그 때 당시에 5천부를 찍었지요. 그런데 38선 이북에서 3천부가 팔리고 이남에서 2천부가 팔렸어요. 그만큼 이북에서 이남보다 독서량이 많았다는 증거지요. 우리나라 시단에 큰 족적을 남긴 시인 중 한 사람은 김삿갓(김병연)입니다. 그분을 대부분의 사람은 술 한 잔에 시 한 수 지은 사람 정도로만 알고 있는데 그것은 아주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한문이 들어온 후 처음에는 이두라는 문자를 만들어 우리나라 말을 이어받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나마 중국의 영향력으로 없어졌지요. 고려 시대에는 구결로 부호화하여 명맥을 이어받기는 했지만 우리말을 표현하는 문자는 없었어요. 물론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우리글을 만들었지만 그것을 시로 쓴 사람은 거의 없었지요. 대부분의 학자는 한글을 천시하였거든요. 김삿갓은 그 와중에 한문과 우리말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여 시로 승화시켰어요. 대단한 분입니다. 시를 제대로 쓰려면 우리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혼이 다 담겨 있거든요. 시는 우리말을 사용해야 한국적인 향기가 그대로 전달됩니다. 지금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은 기계적인 서양어에 익숙해져 있어요. 서양어로는 우리의 혼이 담겨 있는 시를 쓸 수 없어요. 서양어는 유행성이 있어 사라집니다. 시는 사라지는 언어로 쓰면 안 됩니다. 우리나라 고유의 시가 뭔지 아세요? 시조입니다. 시조는 우리 고유의 시에요. 한시의 7언 절구, 5언 절구를 완전히 벗어나 3·4조 우리 고유의 시 형식을 보여주고 있지요.

 

<이산>

선생님은 우리나라 시인 중에 어느 시인이 가장 인상에 남습니까?

 

<황금찬>

글쎄요. 각자 특색이 있으니 누가 좋다 나쁘다 이야기할 수는 없지요. ! 김소월도 좋고요. 김소월은 우리의 토속적인 정서를 그대로 담고 있지요. 대단해요. 김영랑, 박목월, 정지용, 서정주도 모두 하늘이 낸 시인들이에요. 모두 노력을 많이 한 분들입니다. 김영랑은 우리의 말을 절대어로 표시하지 않지요. 예를 들면 냄새내음으로 하지요. 느낌이 다르지 않나요? 서정주의 귀촉도를 보세요. ‘~울고 갔다는 표현 대신에 피리 불고 간다.’라고 합니다. 일본사람들이 뭐라고 할까봐 슬픔을 그렇게 표현한 거지요. 대단합니다. 범인들은 주로 절대어를 사용하는데 이런 시인들은 시의 개념을 만들어요. 박목월의 청노루’, 유치환의 깃발에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같이 새로운 언어의 개념을 만드는 겁니다. 소름 돋지요. 요즘 사람들은 시에다 욕을 쓰기...도 합디다. 거 참!

재작년에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시와 관련된 행사를 했습니다. 작년에 프랑스에서는 전국 학교를 대상으로 한 시 행사를 가졌습니다. 굉장했지요. 시를 사랑하는 나라들입니다. 그때 프랑스 문화원장하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프랑스 문화원장에게 프랑스 고등학생들은 시를 어느 정도 암기 하나요?’라고 물었더니 보통은 100편 정도 외우고 좀 잘하는 학생은 120편 정도는 암기한다.’는 거예요. 그 정도를 외우지 않고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시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에 무슨 시가 출제 될까하고 거기에만 관심을 가져요. 시를 죽여 놓고 시의 시체만 보고 있는 거지요. 선진국에서는 예술과 문학을 아는 데에서 학문을 시작하는데 우리나라는 관념적으로만 시를 알고 있지요. 실상은 모르고. 그러다 보니 시가 뭐에요? 시시한 게 시 아닌가?’라는 말이 나오죠. 목적을 갖는 문학은 좋은 문학이 아니죠.

 

얼마 전 뉴스를 보았더니 영어로만 대화하고 수업하는 곳을 만든다고 하더군요. 언어를 영어로만 쓰자는 사람도 있고요. 귀신은 어디 가서 뭐하나 모르겠어요. 그런 사람 안 잡아가고. 내가 귀신이라면 제일 먼저 데려갈 거예요. 말은 그 나라의 생명입니다. 생명을 말살시키려는 사람들이 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힐 일입니다. 외무부에 근무하던 시인 친구가 있었어요. 외국에 대사로도 나가곤 했지요. 그 사람이 우리나라 말에는 있는데 다른 나라에는 없는 말이 많아라고 말하더군요. 그 친구는 뭘 잘 모르는 것 같더군요. 아무리 우리나라 말 중에 형용사가 많다고 하더라도 표현이 다를 뿐이지 어느 나라에도 말은 다 있다는 거예요. 어떤 마음, 어떤 감정을 갖느냐 안 갖느냐의 문제지 표현은 어떤 형태로든 있는 거지요. 그 표현이 단 하나의 표현으로 되기도 하고 구체적으로 더 세분될 수는 있겠지만.

일본인 오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한국을 너무 좋아해서 성을 전 씨로 바꾸기까지 했어요. 내가 여태까지 살면서 그 사람만큼 한국말을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여기에서 몇 년 살기도 했지요. 맨 처음에는 고생도 많이 했다고 해요. 항아리가 깨진 것을 우리말로는 깨진다. 부서지다. 망가진다.’ 등으로 다양하게 쓰잖아요. 아무튼 그 사람이 쓴 시를 들은 적이 있는데 대단했어요. ‘달빛은 교교하고 물결은 잔잔하데어떻게 외국인이 교교하다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지.. 아무튼 외국인이 우리말을 공부하려면 고생 좀 하지요. 우리는 주어 없이 쓰는 말이 많잖아요. 이심전심으로 공간적으로 이해되는 말이 있다는 것을 외국인들이 어떻게 알겠어요. 영어는 과학적이고 설명적인 데 비해 한국어는 은유적이고 공간적이죠.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말은 프랑스어처럼 시 쓰기에는 좋아요. 그런데 철학적이지는 않지요. 독일어가 철학적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철학이 발전했는지 모르지만.

<이산>

요즘 소설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황금찬>

요즘 소설은 조선일보의 김동인 문학상을 받으려고 쓰는 것 같아요. 상금이 5천만 원이나 하거든요. 너무나 현실적인 생각으로 소설을 쓰는 것 같아요.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소설은 많은 경험을 가지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시와는 다르지요.

정비석은 소설을 김동인에게 배웠어요. 몇 번인가 소설을 써 가지고 가도 김동인은 계속 집어 던지더래요. 어디가 어떠냐고 하면 시끄럽다하면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정비석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던지면 소설을 그만 쓰려고 생각했다고 하네요. 그런데 김동인이 그 소설을 읽어보더니 내 생각에는 이 부분을 고쳤으면 하는데, 그리고 한번 신문에 내 보게나그 소설이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당선된 졸곡제. 그 다음 성황당소설이 나왔지요. 소설가 중에 이태준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분이 성황당을 읽더니 당신은 주로 에로틱한 소설을 쓰겠구만그 말이 맞았지요. 정비석의 소설은 대부분 에로틱한 소설이지요. 정비석은 기생열전으로도 유명했는데 언젠가 전주에 있는 비빔밥집에 갔었지요. 정비석이 내가 옛날 같으면 땅 안 밟고 살았을 거야. 기생들에게 대우를 좀 받았을 텐데 말이지그러더군요. 정비석은 소설이 영화화되면서 돈 좀 벌었어요. 좋은 작가에요.

W.오든20세기 첫째가는 시인 일거에요. 대단하죠. 무명전사 비문에 나온 첫머리에 넌 누구의 명령으로 여기 누었느냐라고 썼어요. 얼마나 대단합니까? 화천에 가면 파로호 전투 기념비에 쓰인 비문에 이은상이 쓴 길손이여 자유민에게 전해다오. 우리는 겨레의 명령에 복종하여 이곳에 누웠노라고’(이는 기원전 650년 그리스 스파르타와 페르시아의 전쟁에서 전사한 전사자의 비문 길손이여! 자유인에게 전해다오. 우리는 조국의 명령에 복종하여 여기에 누웠노라고에 나온 것을 모방한 것으로 보임)라는 글과 비교해 보세요. 얼마나 멋있는 시인지. 미얀마 출신의 우탄트 UN사무총장이 죽었을 때였어요. 작곡가 카자스(당시 81)오든에게 전화를 했어요. 우탄트를 기리는 곡을 작곡하려는데 당신이 시를 써주시오. 내가 보기에는 당신의 시가 최고인 것 같소, 다만 원고료는 없소. 오든이 OK해서 세계 평화를 위해 헌신한 우탄트를 위한 노래가 나왔지요. 그런 오든65세의 나이로 뉴욕을 방문했을 때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내가 요즘 시집을 한 권 잃어버렸어요. 김광균의 임진화란 시집인데 아무리 찾아도 없네요. 이산 선생이 한 번 구해 주세요. 김광균이 일본 북해도에 갔을 때였어요. 어느 집에 들렀을 때 늙은 매화나무를 보고 너는 조국을 잃어버리고 여기에 서 있구나.’라고 울었다지요. 집주인은 그 매화나무가 임진왜란 때 출전한 조상이 경상도에서 가져온 거라고 말을 하더랍니다. 그때 김광균이 울면서 읊은 시가 임진화에요. 참 좋은 시에요.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고혈압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병원으로 병문안을 간 적이 있어요. ‘내 병을 고치려고 했는데도 잘 안 되는구먼. 그만 떠나야 될까 봐그 말을 하고 며칠 있다가 세상을 떠났어요.

 

<이산>

저는 문학을 이끄는 동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최소한도 고등학교 과정에 철학, 논리학, 수사학 같은 학문이 들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황금찬>

맞아요. 논리학이 고등학교 과목에 있어야 하지요. 선생님들의 역할이 중요해요. 입시 위주로 시를 가르쳐서는 안돼요. 죽은 시를 보고 시라고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대화가 끝날 때쯤 북한산 자락 수유리에 있는 선생님의 자택에 도착했다. 이후 2주 정도 지나서 선생님이 부탁한 김광균의 임진화시집을 갖고 황금찬 선생님이 자주 찾았던 혜화동로터리에 있던 엘빈커피숍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정리한 글이다.

 

달구비처럼 내리던 빗줄기가 힘에 겨웠는지 여린 팔을 헤젓는다. 혜화동 로터리 서쪽 편 2층에 있는 엘빈커피숍. 이곳에서 황금찬 선생님과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선생님이 오래전부터 이 다방을 자주 찾는다고 하셨다. 3시 약속을 했는데 차가 밀려 34분에 도착했다. 주위를 둘러봐도 선생님이 안 보였다.

황금찬 선생님! 오셨었나요?”
아직 안 오셨어요.”

요동치던 심장의 박동 소리가 수평선으로 내려앉는다. 건물 밖에 있는 엘빈이라는 이름을 보고 머리를 갸우뚱했었다. 그 의문은 금세 풀렸다. 다방 안에는 엘빈이라는 간판이 영문으로 쓰여 있었다. 엘빈은 대문자 'L''Bean'의 합성어였다. 다방의 로터리 쪽 창문과 그 반대쪽 창문은 서로 소통하고 있다. 서울에서는 보기 드문 구조다. 어릴 적 살던 초가집이 생각났다. 무더운 여름이 되면 방문과 맞은편 창문을 열어 에어컨을 대신했다. 창문 사이로 푸른 잎사귀가 자주 기웃거린다. 아마도 반대쪽 창 사이로 마주 보이는 잎사귀와 사랑을 나누나 보다. 문 옆에 잇대어진 커피주방(?)겸 카운터가 타원형으로 허리를 둘렀다. 동서로 있는 양쪽 창문 쪽 좌석은 한 계단 높이를 더한다. 그리고 가운데는 배 밑바닥처럼 주저앉고. 보이는 테이블은 7~8개이지만 숨겨진 공간에도 몇 개의 테이블이 머리를 감추고 있었다. 커피숍이지만 새로 리모델링을 하였는지 테이블과 의자가 정감이 가득하다. 그윽한 커피 향과 어우러진 벽, 조명, 테이블, 의자의 색조가 미술작품 같다. 선생님은 330분경에 도착하셨다. 을 눌러쓰신 선생님은 오늘은 안경을 쓰지 않으셨다. 선생님은 약속시간을 4시로 알았다고 하신다. 엘빈 커피숍은 20여 년 전에 처음 문을 열었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신다.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커피를 만들려면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 이곳 주인도 처음에는 그 커피 자격증을 걸어두고 커피를 만들었다. 나도 선생님 못지않게 커피를 좋아한다. 설탕도 프림도 없는 순수한 커피 맛을 즐긴다. 아가씨가 살포시 갖다 놓은 커피를 한 모금 음미했다. 선생님께서 왜 이 커피숍을 좋아하시는 지 알 것 같다. 혀 사이를 휘돌아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커피 맛이 일품이다. 착착 감기는 것이 사랑스러운 여인의 살품처럼 달콤하다.

커피값은 비싸지만 맛은 좋지요.”

선생님이 한 말씀 건네신다. 벌써 리필을 두 번이나 받았다. 옛 커피숍 주인은 품격이 있는 커피 맛만 남기고 5년 전 다른 곳으로 갔다고 했다. 선생님과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나의 부족한 맞장구에도 불구하고 대화는 거의 3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나이를 뛰어넘은 공감대가 그만큼 많았나보다. 우리의 대화는 김구용(본명 김영탁) 시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김광균 시인은 저자 서명을 한 다음 임진화시집을 김구용 시인에게 증정했다. 그것을 김구용 시인이 재직하던 00대학도서관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선생님은 김구용 시인을 잘 알고 계셨다.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살아계신 문학인 중에서 제일 연세가 많으신 분은 97세의 피천득 선생이고 그다음 당신인데 현직으로 문학 활동을 하시는 문인 중에는 당신이 제일 나이가 많다고 하셨다.

 

<황금찬>

우리나라에서는 저자가 증정한 책을 가볍게 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거 옳지 않아요. 미국에서는 저자로부터 증정 받은 책은 아주 귀해서 높은 가격으로 거래가 됩니다. 김광균 시인은 웬만해서 증정하지 않았지요. 아무튼 증정 받은 책은 잘 보존해야 돼요. 저자의 마음이 담긴 거잖아요.

요즘 데모를 너무 심하게 하는 것 같아요. 나는 데모하는 것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여태까지 살면서 일을 잃은 적이 없지만 그렇다고 얼마를 달라고 한 적도 없어요. 서로에게 원하는 것을 해주면 되는 것 아닌가요. 서로 갖겠다고 하면 다툼만 남지요. 문익환 목사는 나와 동갑내기인데 내가 시인으로 만들어 준 사람이죠. 아주 친한 친구였어요. 그렇지만 그 친구의 행동에는 난 동의하지 않아요.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칼을 가지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칼보다 꽃이 더 낫다고 생각해요.

 

<이산>

. 선생님. 저도 똑같은 생각을 해요. ‘인드라의 그물에 달린 다이아몬드 그물추가 생각납니다. 빛을 서로에게 비추면 빛이 되지만 어둠으로는 아무것도 세상을 밝힐 수 없는 거잖아요. 남을 위해서 빛이 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위해서 빛을 내는 거지요.

 

<황금찬>

맞아요. 나는 유치원 선생 빼고는 선생을 다 해봤어요. 초등학교 선생으로 몇 달, 중학교, 고등학교 선생도 했어요. 저 건너 동성고등학교에서는 1979년까지 20여 년 있었지요. 그 이후 강남대학교에 있었고, 추계예술대학에서도 나이 70될 때까지 있었어요. 돈을 많이 주더군요. 학교에서는 만류하였지만 나이가 들어 더 못하겠더군요. 나중에 저 대신에 김광림 시인을 소개를 해주었는데 내가 받은 월급 들었던 터라 그만큼 못 받는다고 속았다고 그러더군요. 하하하. 아마 나에게만 특별대우를 해준 것 같아요.

황순원은 아시아 단편소설 응모에 당선되어 1950년대에 3천 달러를 받았어요. 무척 큰돈이었죠. 1950년대 미국의 헤럴드 트리뷴지는 세계 단편소설을 모집했어요. 6천여 편이 응모되었지요. 그 중에서 60여 편의 단편소설을 뽑아 전 세계 10개 나라로 보냈어요. 1950년 가을이었어요. 물론 그 나라 말로 번역한 책으로 만든 다음 독자들의 반응을 보기 위한 것이었지요. 나는 전쟁 중에 일본어판으로 된 그 단편소설을 읽었어요. 어떤 소설이 당선되었나 궁금했지만 알 수 없었지요. 까닭을 비롯한 4편의 단편소설이 당선작으로 그해 12월에 발표되었지요. 스웨덴 작가 1, 노르웨이 작가 1명 그리고 프랑스 작가 2! 그때만 해도 일본과 수교가 되지 않아 나는 그 책을 1957년 되어서야 읽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번역을 시작했어요. 일본어책으로 된 그 소설들은 군중이라는 일본의 유명한 소설 문예지에 실렸지요. 그 책을 내가 번역하여 1960년대 출판했는데 실패했어요. 많이 안 팔렸어요. 어떤 시인에게 왜 책이 안 팔리지 않느냐고 했더니 요즘 젊은 사람들은 복잡하거나 생각하는 책은 안 좋아해요사실 그래요. 요즘 사람들은 인터넷 때문에 문제가 많아요. 저는 인터넷이 이점도 많지만 인간성을 말살하는 악마라고 생각해요.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지요. 젊은 사람들은 생각하는 걸 싫어하지요. 나는 고등학교에 논리학을 교과 과정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학생들은 생각하는 걸 아주 싫어해요.

 

<이산>

맞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중고등학교 교과 과정에 논리학, 수사학 그리고 윤리학을 넣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즘 사회는 ‘Line 사회라고 생각해요. 자기와 코드가 정확히 일치하지 않으면 무관심하지요. 컴퓨터 게임처럼 정확히 상대방을 처치할 경우에만 점수화되고 그것이 승리의 조건이 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회선의 대화가 아니라 틀의 대화였다고 생각해요. 전체의 틀 내에서는 자유롭게 서로의 생각을 공유했는데 지금은 생각이 정확하게 일치되는 경우에만 의미가 있어요. 신입직원들이 그래요. 지시한 것 이외에는 관심이 없어요. 정확히 지시한 것을 빼고는 그 옆에 일거리가 있어도 내버려 두는 경우가 많아요. 이렇게 인간은 점점 더 소외되기를 갈구하는 것 같아요. 외로움 말입니다. 스스로 그 외로움을 만드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할 지를 모르는 것 같아요. 문학은 살아 있는 삶의 깃발이라고 생각해요. 일반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도 볼 수 있는 문인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지 않나요. 사회를 해부하여 그 시대에서 문제성을 정확히 끄집어내어 스스로 나갈 길을 밝히는 일은 문인들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황금찬>

현대 문화사조가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친 작가로 나는 미국의 드라이저유진 오닐을 들어요. 순전히 제 생각이죠. 미국의 소설가 드라이저 [Dreiser, Theodore, 1871.8.27~1945.12.28]가 쓴 아메리카의 비극이라는 소설은 인간의 근본적인 심리를 정확히 해체했지요. 권력욕, 재물욕, 그리고 성욕 말이죠. 주인공 클라이드는 중학교 밖에 안 나왔지만, 이 세 가지 욕망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남자였지요. 그는 부유한 큰아버지 덕에 뉴욕 주의 어느 공장에서 60여 명의 여자 직공을 감독하는 일을 맡았어요. 그곳에서 그는 로버타라는 아주 아름다운 아가씨를 유혹하여 임신시켜 놓았지요. 그때 그 앞에 부유한 손드라라는 아가씨가 나타납니다. 클라이드는 새로 나타난 손드라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로버타가 완강히 반발하지요. 클라이드TV에서 본 대로 로버타를 죽이려고 호수로 꾀어내지요. 그런데 클라이드는 마음을 바꿉니다. 그렇지만 그 바뀐 마음을 모르는지 우연찮게 로버타는 배가 뒤집혀 죽고 맙니다. 클라이드로버타의 살인자로 전기의자에 죽게 되지요. 독실한 신자였던 그 사람의 어머니는 냉정합니다. 죄를 지은 만큼 갚으라는 말씀이지요. 대단해요. 우리나라의 어머니들과는 사뭇 다르지요. 죄와 벌!

유진 오닐느릅나무 밑의 욕정이라는 소설을 한 번 읽어 보세요. 대단해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애비는 남편의 전처 아들 사이에 난 아기를 죽인 혐의로 검사의 추궁을 받아요. 애비가 검사의 논고에 맞섭니다. ‘당신은 누군가 당신의 행복을 빼앗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할 말이 없다. 당연히 대항해야 하지요. ‘내 행복을 막는 그 어떠한 것에도 난 대항할 거예요자식까지도 버리는 대단한 이기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에요.

 

유리창으로 비껴가는 빗줄기 사이로 어둠이 점차 밀려들고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설 때를 우리는 알고 있었다. 눈빛의 대화였다. 호랑이 눈썹이 노안의 파수꾼이 된 선생님의 눈이 참 선하다. 이런 날의 비는 맞아도 좋다. 빗방울 하나하나가 행복의 구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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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산

2007년 황금찬 추천으로 문학세계로 등단

시집 사뜸마을의 샘』 『길에서 길은 열린다산문집 천자봉일기

 

2.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공원길 17, 1081504(독립문극동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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