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찬 선생

                                                                                                                                                                        성기조

후백 황금찬 선생께서 이 세상에서 일백년을 사시다가 지난 4월 8일 떠나셨다.

일백살, 현대의학이 발달되었다고 해도 오래 사셨다. 황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50년대

내가  선생을 하고 있을 때 황금찬 선생도 서울 동성 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계셨다.

내 막내아우가 그때 동성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무슨 일인가 있어서 그 학교에 갔다가 황선생을

 교무실에서 만나게 되었다.


무척 반가웠다. 강릉에서 교직에 게시다가 서울로 오신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같은시 詩業 시업에

종사하니 자주 만날수 있지 않겠는가 고 말씀하셨다.  그 뒤로 종로 YMCA 뒷 골목에 있던 전원다방에서

늘상 만나 뵙게 되었다.  그 다방에는 전영택 소설가, 이범선 소설가, 구경서 시인, 주태익 방송작가,

이보라 방송작가들이 자주 나와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이들과 어울리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다가

저녁때가 되면 피맛골 골목으로 옮겨 앉아 대폿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황선생은 강릉에서 오셨기에 서울이 낯설기도 했지만 식구들이 많아서 무척 어렵다고 토로했는데 그 때마다 우스개

소리를 섞어서 재미있게 말씀하셨다. 특히 눈을 크게 뜨고 좌중을 휙 둘러보면서 "맞지 내 말이"라고 확인을 하기했다.

그런 제스처는 술 값을 누가 낼 것인가를 먼저 정하고자 하는 의도로 술이 거나해지기 전에 이를 확정해 놓은 다음

마음 놓고 마시고자 하는 생각이 분명했다.

황선생은 그 때한창 유행하던 서부영화의 주인공처럼 바른 손을 들어  인지와 중지를 펴서 권총을 쏘는 흉내를 잘 냈다.

손을 총처럼 들어 올리고는 권총의 방아쇠를 풀 때 나는 쇠소리를 내듯 입으로 "끽끽"소리내어 흉내를 내면서

"오늘은 어느 집으로 갈까"라고 했는데 이것이 곧 술을 마시자는 신호였다. 술을 마실수록 호탕해지고 마음에 여유를 갖는

황선생은 후배 시인들을 무척 챙기는 인정 많은 분이기도했다.


그 뒤, 나나 황선생이나 서로 바쁘게 사느라고 자주만나 뵙지 못하고 책을 낼 때 서로 보내주면서 안부와 작품 평을 간단히

적어 보내는 그런 사이로 지내다가 80년대 말부터 자주 만나게 되었다.


내가 문학 진흥 재단을 모윤숙시인 ,박종화 소설가,전광용 소설가,서항석 희곡작가,전숙희 수필가. 부완혁 선생등과

설립하여  우리문학 작품 중 우수한 작품을 선정하여 영,불,중국어로 번역,세계 각국에 보급하는 일을 할 때였는데

"한국대표시선"을 기획 1백 명 안팎의 시인들을 골라 번역할 작품을 결정할 때 황선생의 작품도 넣었다.

그 때 황선생은 내 손을 꼭 쥐더니 "생전 처음이야"하고  말하면서 그렇게 좋와 할 수가 없었다.


이 일이 인연이 되어 황선생과의 사이는 더욱 가까워졌고 뒷날 김문중 시인이 이끌던 백양시낭송회회 불려나가 축사도

하고 축시도 낭송할 때마다 자연스레 그 모임의 고문이시던 황선생을  매번 만나게 되었다.

황선생은 나를 만나는데도 격식을 갗추고 정중하셨다.

김문중 시인의 낭송회는 세종문화회관이나 광진문화원에서 주로 개최되었는데 참가 인원이나 청중들의 규모가 국내에서

제일 큰 낭송회였다.


2002년 예술원 회원 충원 문제가 있어서 펜 클럽에서 황금찬 선생과 박태진선생 두분을 추천했는데 최종심사에서 배제되는

일이 생겼다. 이 소식을 듣고 두분선생과 함께 저녁자리를 마련하여 위로하는데  "그럴줄 알았어"....하시고는 쩝쩝 입맛만

다셨다. 다음해에 다시 추천을해 드리겠다고 말했더니 손 사례만 쳤다. 두 분의 개결한성품을 보는것 같았다.


2천년으로 들어서서 내가 한국 펜 회장으로취임하여 여러가지 일을 할 때 황선생을 고문으로 모셨고 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노무현 후보를 만나 "예술인 복지조합"을  만들어야 한다고 설득할 때 나와 함께 동행하기도 했다.


같은 시기(2002,11) 이회창 후보 선거대책 본부에 관계하면서 내가 대통령공약을 만들 때(대통령 선거 때 최초로공약집을 만듬)

예술인 복지 조합과 국제문학교류센터, 어려운 시인, 작가들이 창작할만한 장소로 쓰일 회관, 지방문인들이 서울에 왔을 때

 함께 이용할회관 등을 지어야 한다는 것을 대통령 선거 공약집에 넣었다.

그 때 황선생은  이를 보고 참으로 좋아하시며 이제야 가난한 글쟁이들이 보람을 느낄것이라고 말씀하기도 했다.


황선생이 여러 가지로 협조해주시는 고마움을 헤아려 영어로 번역해서 단독으로 출판해 드렸는데 정말 좋와하셨다.

번역시집을 황선생께 드렸더니 두 손으로 받고 책상 위에놓은 다음 몇 번이고 쓰다듬으면서

 " 내 시집이 영어로 번역되다니..." 하고 감개무량해 하시는 모습은 꼭 어린아이 같았다.


황선생은 남을 칭찬하는데 인색하지 않은 분이셨다. 나에게는 항상 펜클럽을 가장 잘 운영한 회장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드셨고 많은 일을 하는 것을 보시고는 "몸 조심해요, 건강해야 우리가 잘 살지. 안 그래?" 란 말을 자주 하셨다.

그 외에도 한국문학진흥재단 산하 한국문학세계화본부의 이사직을 맡아주시는 등, 내가 하는 일에 적극 협조해 주셨다.



김문중시인이 전국 시낭송대회를 하면 상임 심사위원으로 나와 황선생이 빠지지않고 참석했고 그때마다

"한국시낭송가협회" 의 발전과 시낭송회의 앞날을 걱정하셨다.


그러나 한가지 죄송한것은 황선생의 望百망백을 기념하여 문학의집에서 행사를 할 때 나는 발기위원이면서 막상

그 모임이있는 날 축사를 하게 되었는데도 몸이 불편해서 참석하지 못했다.  그때의  죄송한 마음은 내가 살아 있을

동안  계속 가슴에 남을 것 같다.


황선생은 우리 나라에서 현역으로는 최고령시인이셨다. 올해로 일백살 횡성의 아들 집에서 노환으로 별세 하셨고

발인은 4월11일 강남 성모병원,2013년에 39번째 시집을 냈고 "동해안 시인"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대표작으로(보릿고개),초기에는 향토적 서정시를 주로 쓰다 점차 현실생활 감정을 즐겨 썼고 나이 들면서 기독교

바탕을 둔 정신세계를 천착했다.


오오, 슬프다, 어디서나 맏형 같기만 하던 선생이 이제는 뵐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이 무척 아쉽다.부디 영면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