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꽃梨花 피는 방

양 명 섭

벽에 걸린 액자에서

이화梨花, 월백月白, 은한銀漢,

하얀빛 언어들이 튀어 나온다

은하에 살던 자규子規* 한 마리

같은 꽃잎 털어내며

귀촉도歸蜀道 귀촉도歸蜀道* 목청 돋아 피를 토한다.

한바탕 울어대던 자규는

한결 가벼운 몸짓으로

나뭇가지에 어린 봄을 쪼아댄다.

창밖에 후두둑 후두둑

소나기 한 줄기 춤판이 끝나자

빈 액자 속에서는 하르르 하르르

배꽃이 무너지고

달이 무너지고

은하수가 무너지고

꽃잎에 어린 봄기운도 사라져 갔다.

날개를 접고

뒷모습만 남는 방

배꽃이 사라진 빈 액자 속에 하얗게 내리는 달빛

*자규: 두견새, 소쩍새, 접동새, 귀촉도, 불여귀

*귀촉도: 망하고 없는 고국 촉나라로 돌아갈 수 없음을 통곡한 촉나라 충신의 넋이 화해서 새가되었다는 설화

- 이조년李兆年의 시조時調를 모티브로-

패랭이꽃의 이별

양 명 섭

바람 타고 날아왔다.

산중山中의 척박한 돌 틈에서

민초들의 패랭이를 쓰고

함초롬히 피어난 당신

불덩어리처럼 달구어진 갈증에도

모진 비바람이 삼킨 어둠에도

강한 모성으로 씨앗을 지켜왔지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적당한 때에 가는 이야

행복하겠지만

서두르는 님에게는 아직도 먼 하늘이 있기에

지금 손 흔들어 떠나기에는

차마 가슴 찢는 시간이리라

보내는 마음 정만으로는

잡을 수 없음을 알기에

뿌리치는 소매 끝에 분명

눈물방울 맺힘을 알면서도

그냥 보내줄 수 밖에

아직도 여물지 못한 씨앗을 남긴 채

무지개처럼 짧은 여정에

영원히 이별하고 하늘을 마치는

패랭이꽃의 낙화!

차마 움직이지 않는 날갯짓

가던 몸짓 뒤돌아보고 머뭇거린다.

장독대 위의 고향

양 명 섭

장독대 위에

호박, 오이, 가지, 상추 등의

몇 가지 모종을 사다 심었다.

상추는 끝물이라 씨가 맺었다

오이는 잎과 덩굴손 사이마다

노란 꽃과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렸다.

서재 창문 밖,

하늘거리는 오이 잎 너머

뭉게구름 따라가면

내 고향 향하여 놓여있는 초록빛 다리

고개티* 지나 마을 앞 느티나무 아래 정자가 있고

꼬불꼬불한 고샅길 따라서 가면

쪽 머리 함초롬히 지으신 내 어머니

보기도 아깝다는 아들을 보며

“내 강아지 왔는가!” 손잡으실 때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 소리

창문 밖 흔들리는 오이 잎 너머

어머니 얼굴이 가물거린다.

*고개티: 고개를 넘는 가파른 비탈길

빗속을 걷다

양 명 섭

들어 가슴을 적시고

가을비 맞으며 몽롱한 자정

자동차 불빛 사라져간다

도시에는 등대가 없다

이 가슴에도

해 지고 달 기운지 오래다.

사무치게 그리울 때는

차라리 울어버려라

심장 터질 때까지

시린 파편 토할 때까지

식어가는 사랑

상처 곱씹지 말자

도마뱀 꼬리처럼 잘라 던지고

터벅터벅 내 길을 걸어가야 해

뒤돌아보지 마라

가로등 꺼질 때까지

최우와 팔만대장경

양 명 섭

만대장경이 완성되자 최우는 선원사에서 수만 명의 백성이 경판을 이고 강화를 돌아 황궁으로 향하는 경축 행사에 나왔습니다. 마치 황제가 궁녀들을 거느리듯 서른 명이나 되는 첩들과 함께 구경 나왔습니다. 고려 전체가 초토화되는 난리 통에도 사재를 보태가며 해낸 일이고 보면 그 속내 헤아릴 수 없겠지요. 아마도 지금껏 헌신하지 않은 미륵이 몽고군을 섬멸하는 것을 자신은 꼭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목수木手와 각수刻手, 글씨를 쓰는 서원書員이 동원되어 8만여 장의 경판에 무려 5천만 자의 경전 말씀을 새겼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새길 때마다 세 번씩 절을 하였으니 1억 5천만 번의 소망을 기원하였습니다. 모두가 소망의 색깔을 따라 몇 개의 무늬 고운 수를 놓았지만 그중 하나같이 똑같은 색깔은 호국의 일념입니다.

백성이 경판을 이고 한 바퀴 돌아올 즈음 선원사 경내에서 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소리는 장중하면서도 이슬처럼 영롱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퍼졌습니다. 한많던 고려 민족의 가슴에 눈부신 빛살이 종소리에 섞여 와글거렸습니다. 하늘 맑기가 유리 같았습니다.

최우 때문에 억울하게 죽어 중천中天*에 머물던 많은 원혼도 미륵의 종소리에 한을 내려놓고 저승으로 갑니다. 냉혈한冷血漢 최우의 눈에서도 두 줄기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립니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그가 30년의 권좌에서 깨닫지 못한 진리眞理를 가물거리는 등불 앞에서야 깨달은 것입니다. 그로부터 반 시진*쯤 지나서 모든 것을 내려놓은 꽃잎 하나가 가장 정제된 눈물방울만을 데리고 먼 길 떠나갑니다. “대~감~” 비명처럼 울리는 김준의 통곡소리를 남긴 채, 떠나갑니다.

*중천: 인간세계와 저승세계의 사이로서, 죽은 사람들이 환생을 위해 49일 동안 머무는 곳

*반 시진: 1시간

-이글은 역사를 모티브로 한 픽션으로 사실과는 무관함-

성명: 양 명 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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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순창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