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소폰 (1)

 

 

정영기

 

목메어 내뿜는 가슴의 오열

한 맺힌 덩어리 토해내는 소리에

눈썹달도 눈을 감는다

 

바위에 부딪치는 바람소리에

나뭇가지 떨고

눈물 흘리는 색소폰

 

한이 맺혀 불을 뿜는가

산자락에 몸 음추리고 앉자

하소연인가 웃음인가

 

밤길 나그네

오솔길 따라

밤이슬로 눈을 닦으며 걸어간다.

 

 

 

 

 

 

 

색소폰 (2)

 

 

정영기

눈썹달 외로워 어둠을 흔들어

나뭇잎 새에 부딪치는 소리

그 배에 실어 보내는

보이지 않는 사연

 

어둠을 가르며 뛰는 메아리

빈 가슴은 바람에 떨고

밤이슬 물방울이 되여 떨어지는데

 

돌아오지 않는 그임

동트는 새벽 발자국 소리 들리려나

아련히 멀어만 가는 추억

 

 

물먹은 천년바위 되어도

색소폰이 울면 돌아오나

그날이 언제인가,

 

 

 

 

 

생의 한 가운데 (1)

 

정영기

 

뿌연 새벽안개 창가에 잠들었나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 어둠을 뚫고 있네

시간이 멈춘 새벽은 온몸이 시리다

 

머릿속이 꽉 차 빈틈도 없는데

기다려지고 채우고 싶은 심정

가슴속은 빈자리

 

세상을 알려준 그 밤 내게 박힌 별똥별

수많은 별들이 미소 지어도 보이지 않아

어느 곳에 묻혀서 보이지 않나

 

건너간 돌아오지 못하는 강인가

바람에 떨고 있는 물마른 흰 갈대꽃

허공에 손짓만 하고 있구나

 

새벽이 와도 지워지지 않는 안개

외로움 가슴에 묻고

그 여명에 잠들고 싶다

 

 

 

 

 

생의 한 가운데 (2)

 

정영기

 

암흑 속에서 밝은 세상으로

울음 터트리고

행복 찾아 지나온 흔적

 

몸통 절이며 짓누르는 그것

고통은 언제나 멈출까

그 누구도 모르는데

 

희미해지는 행복했던 기억의 잔영들

푸르른 나뭇잎 새도

만추의 물 내린 낙엽처럼 보이네

 

시야에서 거므스레 멀어져

생중에 꿈을 꾸고 사지를 허우적거려도

붙잡을 것도 만져볼 것도 없이 다 떠났네

 

삶의 생명의 존엄

텅 빈 가슴을 움츠리고

허공에 손 흔들고 돌부리 찬다.

 

 

 

바닷가

 

정영기

 

 

은빛으로 반사되어

빛나는 만을 따라

질펀히 펼쳐진 모래사장을 걷노라면

갈매기 손님을 맞는다

 

파도 넘실거리고

그 위에 어선 파도를 뱃머리에 지고

바다는 어머니의 가슴

하늘에 뭉게구름 세월을 부르고

그 가운데

내 마음 한가로이 띄운다

바다는 내 마음에 고향

 

살랑대는 해풍이 목덜미를 스치며

밀려오는 물꽃

고향의 손길인양

은비늘 반짝이는 수평선 위에 잠든다.

 

 

 

 

 

 

변화되는 베트남

 

정영기

나는 40 전 당시 월남 전쟁의 참전경험이 있어 그 당시 치혈하였던 전투로 희생하던 전우들의 모습을 회상하며 현 베트남 에 살고 있는 사랑하는 아들 며느리 손녀들을 보고 싶은 마음에 인천공항에서 베트남 항공기를 탓 다

항공기는 예약대로 시간을 마추워 활주로를 벗어나 상공에서 고도를 잡았다. 나는 1965년 파병하여 1967년 까지 당시 월남 퀴논에 위치한 맹호부대에 00 소대장으로 소대원들과 베트콩(월맹군 계리라) 전투 룰 한 경험과공산주의 이념과 사상 을 가진. 베트콩. 민간인으로 보이는 적의 교묘한 전술로 나에 전우들이 전사하여 군인으로서 명예를 앉았지만 시신 되여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고 한순간이라도 나에. 생명과 소대병력에 승리를 하기위해서는 방어를 최우선으로 하고 전투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베트콩들에게 나에 목숨도 빼앗겨야 하는 상황이 군인으로서 전투였다!

그러나 나는 국가에 부르심을 받고 자유의 십자군으로서 또한 국가경제발전에 도움이 되고 대한민국의 군인으로서 용맹을 떨치며 죽음도 불사하였다

하지만 나는 베트남에서 군 생활 만기로 귀국 을 한지 40여년이 흐른 지금 지구가 공전하듯. 우리나라와 베트남이 국교가 수교된 이후 내 아들의 아버지가 젊은 시절 사상과 이념이 달아 피와 땀을 흘렸던 베트남에 사업차 살게 되여 자식들의 생활에 걱정과 사는 것이 불안한 점.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던 때를 회고하며 생각에 잠기니 어느새 호치민 공항에 비행기가 도착하여 내렸다

나의 눈에 제일먼저 보이는 것은 군인 생활당시 월맹군의 군복에 붉은 견장과 별을 보는 순간 마음이 불안하였다 하지만 그 심정은 과거에 심적 유물인 불안이 지금까지 머릿속 에 잠재하고 있는 것을 실감했다

공항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마중 나온 가족들이 내가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본 나는 군복에 붉은 견장 과 별을 단 사람은 까 막게 있고

간단한 통관절차를 끝내고 공황을 나와 아들 손녀들의 환영을 받으며 공항로비에서 잠시 쉬었다가 공항택시를 탓 다

호치민시의 밤거리는 언제 전쟁을 한나라냐고 할 정도로 변화 되어 길가에 밝은 가로등 .점포에는 네온 싸인 이 반짝 거리였다 참으로 상상 못할 정도의 변화였다

공산주의 사회이면서도 자본주의사회와 병합된 정치를 한 보람이 이라고 생각을 하며 아들의 집으로 들어와 여장을 풀고 잠을 청하려하였지만 잠이 오지 않아 잠을 설치고 아침 일찍 일어나 아파트정원에서 산책 을 하였다

주변조경은 열대의 식물로 신귀하며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때어디에선가 뱃고동소리 누구인가를 부르는 것 같은 은은하고 멀리 뛰어오는 밤잠 설친 여객선의 출발의 소리였다 아이들도 잠에서 깨여 아버지를 찾아와 아침식사는 외식을 하자고하여 베트남우동을 먹게 되었는데 음식의 향내는 입에 맞지 않았다

그래도 베트남에서 처음 먹는 아침식사라 맛이 있게 잘 먹고 아들과 며느리에 권유로 메콩 강으로 관광을 떠나 메콩 강. 선창에 도착하는 것이 먼. 추억이 아스라이 비추어지는 여정 이었다

도로가에 야자수 바나나 그리고 베트남 열대의 고유의 식물들 .야자수 잎으로 만든 움막 같은 집의 지붕 열대에서 시원함은 최고인 듯이. 집들 사이에 잎 새가 무성한 나무가 서있고 나무에는 이름 모를 과일과 아름다운 꽃들이 더위에 지친것 같으면서도 자기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12월 한겨울인대 그곳은 푸른 평야의 들판에 농부들은 모내기가 한참 이었다 아쉬운 것은 모든 것을 사람의 손으로 자연을 만들고 있었다

우리는 몇 시간을 더 달려 메콩강에 도착하여 작은 배를 빌려 타고식당으로 찾아 가는 물길은 흙탕물이지만 아름다웠다 시골의 환경 변화된 모습 양쪽강가에는 야자수 나무와 이름 모를 나무들이 태양을 감춘 샛강의 물길을 따라 가는대 그곳 사람들은 흙탕물에서 고기를 잡고 수영을 하며 줄 거워 하는 모습 이였다

나는 40년 전 월맹군과 전투를 하던 생각이 회상 되어 불안한 심정이었는데 아이들은 지난전쟁이 무엇인지모르고 마냥 줄 거운 모습이다 얼마나 더 가서인가 식당이라고 배에서 내리자고한다 우리는 배에서 내려 식당으로 가는대 몹시도 뜨거운 날씨였다 주인은 우리를 반가웁게 맞이하였다 식단에는 생선튀김 닭튀김 월남쌀밥 전에 먹어 본적이 있어 맛은 알지만 심적으로 불안감을 느끼게 되여 이곳을 빨이 떠나고 싶은 마음 이었다

내가 돌아오는 길에 눈에 보이는 것은 크고 작은 공장들 그것은 우리나라 사업가들이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어려움을 탈피하여 후진국에서 돈을 벌겠다고 만들어 놓은 것이다 우리교민들은 애국자들이 많다 길가 공터에는 많은 건설 중장비 들 대부분이 우리나라에서 중고장비를 수출 한 것이다.

라고 말을 한다. 그러나 베트남의 현재 재정이나 국력보다 앞서간 장비들이었기에 주인을 기다리며 사용할 때를 기다리는 것 같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이틀 밤을 자게 되어 더위를 식히려고 밖에 나가니

식당마다 한국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고 이곳도 삶의 경쟁은 한국과 같다는 것을 실감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니 구찌동굴 (베트남전쟁기념관)을 가기로 하여 그곳 도착한 시간 낯12시 점심시간이 되여 식당으로 가니 그곳은 자연스러우면서도 고급스러워보였다 식당 밑으로는 흙탕물이지만 강물이 흐르고 파란 풀들이 무성하게자라고 언덕 위 후박나무에 개수를 셀 수 없이 매달 여 있는 나무 밑에서 손녀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전쟁기념관으로 가보니

40년 전 월맹 군인들의 생활이 묘사 되여 있으며 월맹군 총사령관호치민이 전투지휘를 하던 곳이다

내개 40년 전으로 돌아가 생각하여 볼 때 모든 시설 및 군 장비는 참으로 낙후된 장비였다 우리나라 방송국에 연속극에 옛날 주몽에서 군 장비를 만들어 쓰던 때와 비슷하다고 나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연합군은 세계에서 최첨단의 무기와 고도의 훈련을 받은 군을 같고도 패전을 한 것은 사상과 이념이 확실한 국민을 가진 호치민의 승리라 생각하며 당시 자유월남 대통령 뉘웅방 티우 는 국가의 안보와 국민들에게 자유 수호에 대한 이념교육이 부족한 것이 패전의 원인이라고 단정하고 싶다

내가 군인으로서 자유에 십자군으로서 이국땅에서 흘린 땀 그리고 전사한 전우들의 목숨이 너무도 안타까워지는 감정 울분을 40년이 지난지금 가슴이 아팟다. 전쟁에 패자는 말이 없다고 하나 세월이 흐른 이제 공산주의도 경제가 어려우면 인민을 통치하기 어려워 공산주의 와 자본주의를 병행하여

많은 외국기업인들이 너도나도 터전 을 닦아 돈을 벌려고 하지만 그 나라에 국익은 되지만 외국인들의 기업은 국가적인차원에서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된 다

공산주의란 언제 정책의 변화가 있을지 모르기에 개인의 힘이란 언제 집시인생으로 변신 될 가봐 걱정도 된 다

그 나라에도 전쟁의 유물 고엽제환자 뜨거운 햇빛아래 길가에 앉아 도움을 요청하는 남자도 아닌 여자의 모습 그 누가고엽제를 만들어 삶에 고달픔과 생명을 재촉하는지 전쟁은 무서운 것이며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전쟁은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이든 다

우리나라에도 월남전 참전군인들 다수가 고엽제 환자가 되여 국가에서

치료는 하여준다고 하나 경쟁사회에서 삶의 의혹과 희망을 잃고 남은생명이 연장되는 그 순간까지 까 막게 죽어가고 있지 않는가? 젊은 시절 국가를 위서인가 누구를 위해 종을 울렸단 말인가

또 한밤을 자고 아침이 되니 아들이 하고 있는 사업장이 캄보디아 국경에

있어 그곳에 도착을 하니 국경선하나로 이민국 사무실이 있어 여권 확으로 왕래가 된다. 그곳에서 우리는 기념촬영을 하고 아들의 사업장을 가보니 내부공사가 한참 진행 중인 것을 보니 가슴이 조여 오는 것 같으면서도 희망이 보였다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고 다음날 뱃고동이 울려 퍼지는 싸이공 강 을 가게 되여 나무그늘에서 더위를 식히느라 쉬고 있는데 유람선이 아닌 여객선이 봉 타우를 간다고 한 다 전에 육지로 가본 적이 있다 그래서 나도 가고 싶은 심정 이였는데 시간이 부족하고 확실히 갈 곳이 없어 집으로 돌아와 귀국길을 생각하며 휴식을 취하고 떠날 준비를 했다

내가 비행기 예약시간은 현지시간으로 02시 베트남 공항에 도착하여 검색을 받고 비행기를 기다리는데 비행기는 출발시간이 다되도록 활주로에 들어오지 않았다 1시간2시간 시간은 흘러갔으나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마냥 기다리고 있는데 비행기는 앤 진 고장으로 빠른 시간에 정비가 안 되면 다른 비행기로 교체한다는 말을 듣고 기다리는데우리나라 여행객인 심장병환자 노인이 가슴이 아프다고 가슴을 잡고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공항직원도 속수무책 이었다

그때 한국사람 장애자 수화통역사 이 미연 씨. 라는 여인이 나왔다 환자는 이 미연 씨에게 나는 심장병환자인데 내가 하노이서 출발을 하여 가방이 다른 비행기에 있다고 한 다 수화 통역사는 신속한 움직임으로 가방을 찾아 약을 먹게 하여 한 생명을 구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비행기는 들오지 않았다 또 1시간이 흘러갔고 마음 다들 초조했다

그때 공항에서 안내방송이 나왔다 방송은 00 게이트로 모이라는 것이 였다.나 도. 사람들 대열에 끼어 따라가 보니 호 탤 셔틀버스를 타라고 하여 어디론가드니 호치민시의 고급 호탤. 로 안내를 하였다 이것은 베트남에서 최고의 대접 인 것 같다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은 2시간뿐이었다. 2시간이 지나니 아침식사를 하라고한다

우리는 잠에 취하여서도 아침 식사를 하고 공항에 돌아와 기다리고 있는 비행기를 타고 무사히 귀국을 하였다 한국에 돌아와 짧은 시간 보고 느낀 것을 생각할 때 베트남은 공산주의로서 자본주의 와 확실한 교류로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도 국민들이 단합과 화합으로

세계의 최고의 국민으로서 강국이 되기 바라며 베트남 여행기를 끝 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