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8회 백양문학회에서 문학강연을 하셨던 황도제 시인의 강연내용입니다.
강연 전문을 보내주신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시인의 역할>

시인은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시를 대하는 시인의 무게와 시를 창출하는 시인이 깊이와 넓이가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테이레시아스이다(시인=테이레시아스)라고 말하고 싶다.

테이레시아스가 어떤 인물이기에- -

어느 날 산정(山頂)에서 오수를 즐기던 제우스와 헤라는 <행복론>에 대하여 논쟁을 벌였다. 남성 ,신인  제우스는 헤라에게 여성으로 태어났음에 대해 축복이라고 말했다. 여성, 신인  헤라는 제우스에게 남성으로 태어났음을 행복이라고 말했다. 둘은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현대판 논쟁이라 가정하면

제우스의 말 : 남자란 태어나는 순간, 군복무는 의무다. 군복무시 전쟁이 나면 목숨을 담보하여야 한다. 제대 후에는 취업의 관문을 뚫어야 한다. 취업의 전제 조건은 학벌이다. 아울러 건강, 인물, 성격, 재력도 갖춰야 한다. 이런 조건의 완비는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고 힘들다. 청춘을 다 바쳐 직장을 얻어도 조퇴와 명퇴는 왜 그리 빠른지. 가장의 임무는 첩첩산중, 책임과 의무는 육신을 골병들게 한다. 결국 왜소해지고 구저분해지다 못해 사그라지고 만다. 남자는 드디어 몰강스러운 처지에 빠지면서도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한다. 남자란 비참한 운명이다. 여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헤라의 얘기 : 여자란 태어나는 순간 산고의 아픔을 벗어날 수 없다. 남자가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우의를 점했다면 배우자 또한 걸맞아야 할 것 아닌가? 그 조건을 완비하려는 노력은 눈물겹다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학벌은 물론 몸매까지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미모까지 겸비해야 한다. 그래서 푼더분한 얼굴인 데도 불구하고 칼을 대고 그 후유증으로 버력을 받아 몸이 망가지고 또 아이를 낳은 후에는 생각지도 못한 후더침으로 삶이 뒤틀어지는 일이 다반사로 나타나는 것이다.  남자들의 요구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요조요부의 양면성을 지니라고 요구한다. 여자들은 비릿비릿하게 여기면서도 아무런 대안이 없다.  서글픔에는 끝이 없다. 여자란 처참한 팔자다.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불행할 뿐이다.

남자는 죄인팔자다. 여자는 뒤웅박팔자다. 두 사람의 얘기는 얼음에 박 밀듯 끝이 없었다. 제우스는 생각다 못해 테이레시아스를 불렀다.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였다.

“테이레시아스여! 진심을 말해 보시오. 남성의 삶이 행복한가? 여성의 삶이 행복한가?”

테이레시아스는 과거를 반추하였다.

장성할 때까지는 남성이 아니었던가. 어느 날이었을까. 산길을 가는 도중 뱀 두 마리가 엉겨 있는 것을 보았다. 아마 운우지정을 나누고 있었던 모양이다. 테이레시아스는 자신의 앞길을 막고 있는 뱀이 약간 괘씸스럽게 느껴져서 긴 막대기로  두 뱀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화간 난 뱀은 주문을 외어 테이레시아스를 여성으로 바꿔 놓았다. 여성이 된 그는 과거를 잊은 채 사랑하는 남성을 만나 아이 둘을 낳고 여인으로서 행복하게 살았다. 그렇게 7년이 지난 어느 날 여성이 된 테이레시아스는 또 산길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7년 전의 모습이 재연되고 있었다. 그는 또 화가 났으며 감정을 이기지 못해 긴 막대기로 엉긴 뱀의 사이를 강압적으로 떼어 놓았다. 화간 난 뱀은 여성인 테이레시아스를 다시 남성으로 바꿔놓았다. 이런 연유로 남자로도 살아보고 여자로 살아 본 테이레시아스야말로 어느 쪽이 행복한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묻노니. 진정 어는 쪽이 행복한가?” 제우스는 재차 질문을 하였다.

“네. 여성이 행복합니다” “얼마나 행복한가?” “여성이 남성보다 9배나 행복합니다.”

이 말을 들은 헤라는 화가 나서 틀린 답이라고 소리치며 테이레시아스의 눈을 멀게 하였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제우스는 자기 때문에 눈이 멀게 된 테이레시아스를 불쌍히 여겨 예언의 능력을 주었다. 이로 인해 테이레시아스는 장님이 되었지마는 뛰어난 예언자가 된 것이다.

예언자는 피(彼)와 차(此)에 대해 잘 알아야 미래를 추측할 수 있다. 앎이 없으면 무지와 다를 바 없다. 예감, 육감, 직감 또한 닫히기 마련이며 대상에 대한 이해가 좁아지게 된다. 따라서 일방적이 되고 드디어 망언 망발이 된다.

시인은 사물이나 대상과의 동일성을 이룰 때 한하여 하나의 시를 완성시킬 수 있다. 대상과의 동일성은 감정이입을 통하여 자아와 세계와 일체감을 이루는 투사(投射)와 세계를 자신의 내부로 끌어들여 내적 인격화하는 동화(同化). 이렇게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바로 그 순간의 합일이 미적체험을 통하여 정서와 사상으로 드러나면 시가 되는 것이다. 시인은 반드시 사물 속으로 들어가 자아와 세계의 일체감을 이루어야 한다. 이때 발현되는 주객일체가 예지의 발로다. 다시 말하면 대상이나 사물의 내면을 천착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으로 대상과 사물에 대한 합일치의 발화가 예언의 눈인 것이다. 만약 시인이 표피에 머무른다면 관찰자 입장에서 눈에 보이는 피상적인 내용만을 그리게 될 것이고 그리 되면 하나의 정물화이거나 사진에 불과한 객관적인 언어 표현에 머무르고 말 것이다. 시에 있어서 인접, 유사, 연상, 유추, 상징, 계사은유를 포함한 모든 비유는 존재하는 사물들과 내밀하게 교유할 수 있는 근원으로써 알고자 하는 또는 알고 싶어 하는 영역을 대변함은 물론 형상화에도 크게 기여함으로써 전방위 예술의 선두에 서게 되는데 이 또한 예지나 예언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시인은 이렇게 근본 구조인 권태, 우울, 절망, 불안, 허무, 근심을  상상력을 통하여 접근 해소함으로써 세계와의 합일에 충실하게 도달하게 되며, 시인은 심미안의 눈으로 주관과 객관, 감정과 이성을 아우르는 세계의 자아화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시인은 깊은 명상에 들어야 하는데 마땅히 예지의 획득을 위한 명상이어야 한다. 이때 명상은 고품격이다. 아울러 모든 세계와의 넘나들이의 단초를 제공함은 물론, 이(理)와 기(氣)의 대립 분별을 해소시키면서 시인의 고유한 미적 체험이 빛을 발하게 하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예지는 기저역할을 할 것이며 예언을 확인케 할 것이다. 이런 경로로 탄생한 시는 뭇사람들을 긴장시키고 탄복시킬 것이다. 그것도 촌철살인처럼 아주 작고 적은 글로 말이다.

시인은 별을 보고 점을 치듯이 먼 미래를 내다보기도 하고 대상의 심층심리를 들여다 볼 줄 아는 예언자다.  다만 길흉화복을 점치는 예언자는 아닌 것이다. 삶의 구경(究竟)인 진리의 모습이 지각의 길을 걸어 시로 드러날 수 있게끔 언어로 꾸미는 주술사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예언자의 전제 조건인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을 모두 만족시킨 상태에서 거리의 서정적 결핍을 본질로 삼는 서정시의 창조자이며 대상을 포용하는 예언자인 것이다.  테이레시아스처럼. - - - 고로 시인은 테이레시아스이며 예언자이다.  


오늘 우연히 시인이 무엇이며 무얼 하는 자인가에 대해 말 할 기회가 있어 생각해 본 것을 몇 자 적어 보았다. 시인들 중에는 테이레시아스라는 명칭을 붙여도 전혀 손색이 없는 분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