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矛盾)의 흙




# 시 전문 읽기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그릇
언제인가 접시는
깨진다.
생애의 영광을 잔치하는
순간에
바싹
깨지는 그릇,
인간은 한 번
죽는다.

물로 반죽되고 불에 그슬려서
비로소 살아 있는 흙,
누구나 인간은
한 번쯤 물에 젖고
불에 탄다.

하나의 접시가 되리라.
깨어져서 완성되는
저 절대의 파멸이 있다면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모순의 그릇.
                             -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1982)



1. 시작(詩作) 배경
  이 시는 인간의 삶에 대한 시인의 성숙한 인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시에서 삶은 유전하는 것이며 고정되거나 머무를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곧 불교적인 緣起說 혹은 輪廻說이 깔려 있다. 이 시에서 그릇은 인간의 모양이다. 흙으로 구워진 여러 가지 모양의 그릇들은 곧 다양한 삶을 살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죽음이 두려워서 삶을 버린다면 인간의 삶 또한 무의미하다. 시인은 바로 이렇게 그릇에서 모순의 흙, 삶과 죽음의 양면성을 깨닫고 있다.

2. 시상의 전개
  * 제1연 - 흙으로 빚은 접시의 깨어짐
  * 제2연 - 영광의 순간에 그릇이 깨어지듯 인간은 죽는다.
  * 제3연 - 인간도 물에 젖고 불에 탄다.
  * 제4연 - 깨어져 완성되는 절대 모순의 접시가 되리라.

3. 주제 : 그릇의 깨어짐을 통해 생명의 완성을 느낌

4. 제재 : 그릇의 깨어짐

5. 표현법 : 수미쌍관법, 반복법, 연쇄법, 은유법



# 이해와 감상

  산업 사회가 급속도로 전개되면서 우리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한편 정신적 가치의 혼란을 체험하는 모순의 상황 속에 살고 있다. 이 시는 이런 사회적 조건과 관계가 된다. 이 시에서 '그릇'은 생활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하찮은 '그릇'의 구체적 사물의 세계에서 벗어나, 인간에 비유하여 존재론적 지평으로 확대하고 있다. 그것은 철학적 차원의 세계를 내면화하여 시적 미의식과 결합시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릇'이라는 사물은 '흙으로 빚어진' 것이고, 언제인가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쉽게 깨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릇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졌다. 결국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모순 덩어리. 그것이 바로 그릇이다.

  2연에서는 이러한 사물의 이미지를 인간의 일상적 삶의 국면과 연결시키는 재치가 보인다. 그것은 이미지의 추구를 넘어 존재의 탐색이라는 차원으로 이동하는 중간 단계이다. '생애의 영광'을 위해서 일생을 살아가지만 결국은 '깨지는 그릇'처럼 인간은 마침내 죽고야 마는 운명을 지닌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죽음이 앞에 놓여 있는 상황이라도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이 삶의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흙이 비록 그릇으로 만들어져 언젠가는 깨질지언정 '물로 반죽되고 불에 그슬려서' '비로소 살아 있는 흙'이 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물로 반죽되고 불에 그슬리는 고도의 정신적 수련이 필요한 것이다.

  4연에서는 인간 존재의 모순성을 '절대의 파멸'로 인식하는 예지를 터득한다.

  접시는 '깨어져서 완성되는' 시적 표현은 모순되는 진술이면서도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한다. 접시가 깨지는 것은 접시가 파괴된다는 점에서 죽음이라고 생각되기 쉽지만, 그것은 사물의 유한성을 벗어나 영원한 존재의 세계로 남는 것이다. '그릇'이라는 언제인가 깨지기 위해서 만들어진 '모순의 그릇'이다. 그런가 하면 모든 것을 담으면서도 비어 잇는 것이고, 담고 있는 그릇은 그 내용물을 버려야 하는 그야말로 모순 덩어리이다. 인간의 삶도 '깨어져서 완성되는/저 절대의 파멸'과 같은 역설적인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생존만 해야 한다는 이념적 구속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여 지상적 삶의 유한성을 초월해,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진정한 정신의 자유를 누릴 필요가 있다. 세속적 삶의 한계에서 초월하여 존재론적 현실을 인식하는 것이 이 시의 주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