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송(墓地頌)




작가 소개

박두진(朴斗鎭 1916-1998) 시인. 경기도 안성 출생. 연세대 교수 역임. 아시아 자유문학상과 대한민국 예술원상 수상. 1939년 <문장>에 “향현”, “묘지송”으로 등단. 박목월, 조지훈과 청록파로 불림. 그들과 합동 시집으로 <청록집>(1946)이 있으며 개인 시집으로는 <해>(1949), <오도(午禱)>(1953), <거미와 성좌>(1961), <수석열전>(1973) 등이 있다. 초기의 시들은 자연 친화적인 교감 등을 보여주고, 기독교적 이상과 윤리 의식을 나타내던 그의 시가 6.25 사변 이후부터는 강력한 민족의식과 역사적 현실의식을 짙게 가지게 되었고, 특히 사회의 불합리에 대한 분노, 저항, 비판의 몸부림으로 발전하여 그의 작품에서도 격정, 분노, 저항의 모습으로 바뀐다. 이런 경향은 후기 시집 <거미와 성좌>, <인간 밀림>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산문조의 부드러운 호흡률, 의성어와 의태어 등의 음성상징의 해조(諧調)는 절정에 이른 느낌이 있다. 그들이 청록파라고 이름지은 이유는, 그들의 시 속 에는 자연을 소재로 한 글들이 대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시 전문




북망(北邙)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란 무덤들 외롭지 않으이.




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루(髑髏)가 빛나리. 향기로운 주검의 내도 풍기리.




살아서 섧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히 비춰 줄 그런 태양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 삐이 배, 뱃종! 뱃종! 멧새들도 우는데, 봄볕 포근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

                                                  

핵심 정리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의지적. 찬미적. 상징적

심상 : 시각적. 후각적. 청각적

구성 :

   1연  시적 공간(묘지)의 묘사(기)

   2연  영원한 생명을 얻은 주검(승)

   3연  죽음이 삶보다 행복하다는 역설(전)

   4연  자연과 행복하게 어우러진 주검(결)

제재 : 묘지

주제 : 영원한 생명에의 의지와 주검에 대한 희망적인 찬양(죽음과 허무의 극복 의지)

출전 : <문장>5호(1939)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무덤을 소재로 읊조리고 있다. 무덤은 비감(悲感)을 자아내거나 무상감(無常感)을 자아내는 소재이다. 그러나 화자의 눈에 비친 무덤은 차원을 달리한다. 무덤은 흔히 유한성의 대상으로 삼아진다. 인생은 죽음으로 마감하며, 그 허무의 그림자가 곧 무덤이다. 화자는 무덤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이 장소라고 인식한다. 이와 같은 비약적 상상은 무덤의 외부에서 무덤의 내부로 시선을 향하게 했으며, 내부에서 또 다시 열리는 새롭고 영생적인 삶을 기쁨으로 노래한다. 즉 ‘무덤’은 ‘탄생’이라는 역설이 되는 셈이다. 역설은 시의 기본 원리가 되는 인식의 행위이자 시적 표현 수단이다.

제1연은 공동 묘지의 묘사이다. 무덤을 덮은 잔디를 금잔디로 미화함으로써 묘지의 음산하고 외진 느낌을 제거하고 있다.

제2연에서는 어두운 무덤 속에서 하얀 백골이 빛나고, 향기로운 시체의 냄새도 풍기리라고 묘사한다. 이러한 표현 속에서는 삶에 대한 강렬한 긍정이 함축되어 있다. 삶이 뜻 있었으므로 '하이얀 촉루'가 빛나고, 삶이 값졌으므로 '향기로운 주검'의 내가 풍긴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3연은 시인의 생사관이 드러난 부분으로, 살았을 때 서러웠던 삶이니 죽어서 서러울 것이 없고, 오직 무덤 속을 환하게 비출 태양만이 그리울 것이라는 내용이다. '서러운 삶이 끝났기에 오히려 슬프지 않다.'는 역설이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일제 치하의 암흑기를 살던 당시 우리 민족의 힘겨운 생존과 무관하지 않으며, 주검이 태양을 그리워한다는 표현은 시인이 죽음을 삶의 연장선으로 보는 데서 기인한 것이다. '무덤 속을 비출 태양'은 현실적으로는 자유의 태양, 즉 보다 나은 세상의 도래를 뜻하고, 종교적으로는 영혼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국 '신생(新生)의 갈망'으로 대표되는 시인의 미래 지향적 초극의 자세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제4연은 이 시의 주제가 되는 연이다. 금잔디 사이에 할미꽃이 피었고 맷새도 우는, 봄볕이 포근한 무덤이 더 없이 따뜻하고 정겹게 그려져 있다. 거기 누워 있는 주검들은 차라리 행복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삐이 삐이 배, 뱃종! 뱃종!'의 의성어의 효과적인 활용은 주검에 생명감과 활기를 불어넣어 준다.




<참고> ‘청록파’에 대하여

주로 자연을 제재로 하여 시작활동을 하는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 세 시인을 일컫는 말. 1946년 세 시인이 공저한 시집 <청록집>이 을유문화사에서 간행되었는데 이 시집의 이름에 의거하여 '청록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시집은 A5판으로 박목월의 시 “청노루”에서 책명을 따 왔다고 하며, 박목월의 “나그네”를 비롯하여 모두 15편이 수록되었고, 조지훈의 시는 “봉황수”등 12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박두진의 시는 “향현”을 합하여 12편이 수록되어 총 39편이 수록되었다.

세 시인은 각기 시적 지향이나 표현의 기교나 율조를 달리하고 있으나, 자연의 본성을 통하여 인간적 염원과 가치를 성취시키는 시 창조의 태도는 공통되고 있다. 서정주는 이러한 공통점에 근거하여 ‘자연파’라고 호칭 한 바 있다. 이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광복직전의 일제치하에서 쓰여진 것으로서 시사적으로 중요한 의의가 있다.

박목월의 향토적 서정에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의 의식이 살아 있으며, 이를 통하여 일제 말기 한국인 의 정신적 동질성을 통합하려고 한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 그의 민요풍의 시형식도 그러한 민족적 전통에 근거하고 있다.

조지훈의 전아한 고전적 취미도 한국인의 역사적 문화적 인식을 일깨우는 뜻이 있으며, 민족의 문화 적 동질성을 환기시킴으로써 일제 치하의 민족의 굴욕을 극복하려 한 의미를 지닌다. 그의 시에서 저항적 요소가 보이고 있음도 그러한 정신적 자세와 연결되고 있다.

박두진에 있어서 자연인식은 원시적 건강성과 함께 강렬한 의지의 상징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그의 기독교적 신앙에서 빚어진 의연하고 당당한 의로움의 생활 신념과 관계되고 있다. “향현”에서 보이는 "침묵의 산에서 불길이 치솟는 심상"을 표현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신앙에 근거하여 일제 시대의 민족적 수치를 극복하려는 기세를 읊은 것이라고 평가된다.

일제 말기의 단말마적인 국어 말살정책의 상황하에서 우리말로써 펴낸 이 시집은 민족의 역사적 문화적 동질성을 드높인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참고> ‘청록집’에 대하여

1946년 을유문화사에서 발행된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3인의 공동 시집. A5판 114면. 서문이나 발문 없이 박목월 편에 “임”, “윤사월”, “청노루”, “나그네” 등 15편, 조지훈 편에 “고풍 의상”, “승무”, “완화삼”등 12편. 박두진 편에 “묘지송”, “도봉”, “설악부” 등 12편으로 모두 39편이 수록되어있다. ‘청록집’이라는 제명은 박목월의 시 “청노루”에서 따온 것이다.

이 책은 처음부터 동인지나 유파 의식을 바탕으로 발행된 것은 아니다.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초 사이에 <문장>지를 통하여 데뷔한 여러 시인들 가운데서, 광복 직후에 서울에서 만날 수 있었던 세 사람 이 모여 발간한 시집인 것이다. 따라서, 이 시집에 수록된 시편은 <문장> 추천 작품들을 중심으로 하여 엮어졌으며, 자연을 소재로 한 서정시라는 점과 일제말 민족어를 갈고 닦아 이루어진 시라는 점에서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마다 각기 다른 개성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박목월은 민족 전통의 율조와 회화적인 감각 을 바탕으로 향토성이 강한 소재를 형상화 시켰으며, 조지훈은 사라져 가는 민족 정서에 대한 애착과 시선일여의 경지를 관조하는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 따라서 동양적이며 전통 지향성을 간직한 선비의 기풍을 느낄 수 있다. 박두진은 주로 자연에 대한 친화와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데 박목월이나 조지훈에 비하여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정신 세계를 구축하였다는 점에서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청록집>은 광복 이전과 이후를 연결하는 시집으로서, 일제만 암흑기의 어려움을 직접, 간접으로 표출한 광복 후 최초의 창작 시집이라는 뚜렷한 시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세 시인은 이 시집을 계기로 하여 "청록파" 라고 불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