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鄕愁)




정지용(鄭芝溶)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초름 휘적시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시어, 시구 풀이]

회돌아 : 휘감아 돌아

지줄대는 : 거침없으면서도 다정하고 나긋나긋한 소리를 내는

해설피 : 소리가 느릿하고 길며 약간 슬픈 느낌이 드는 것을 가리킴

얼룩백이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따가운 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들판에 누워 유유한 울음을 우는 황소의 모습이 한가롭게만 보이는 곳. 여기서는 금빛이 가장 느리게 보이는 색깔로 보았으며, 따뜻하고 찬란한 그리움을 돋우는 한가한 울음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청각적 현상을 색채로 표현한 공감각적 이미지이다.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이 시의 후렴 역할을 하는 시구로서 주기적 반복을 통해 고향의 정경에 대한 정서적 환기 효과를 거두고 있다. 또 각 연의 시상을 정돈해 주는 효과를 거두기도 하고, 반복을 통한 형태적 안정감에도 기여하고 있다.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 한밤중 문밖으로 들리는 바람소리가 말 달리는 소리처럼 들리고

함초름 : 가지런하고 고운 모양

휘적시던 : 마구 적시던

서리 까마귀 : 가을 까마귀

엷은 졸음 : 살풋 든 졸음을 감각적으로 표현

전설(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 짙은 검은 머리를 가진 누이의 머릿결 흩날리던 어린 시절의 모습을 그려 보며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 시 안에 나타나는 ‘아내’가 이 땅의 어느 곳에서나 있음 직한 평범한 여인의 모습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특히 이 연에서는 ‘누이’나 ‘아내’로 대표되는 가족 공동체가 살고 있는 고향에 대한 향수가 나타나 있다.

사철 발 벗은 아내 : 농사일에 바빠서 신도 잘 추스려 신을 사이가 없는 토속적인 아내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 모래성처럼 아련한 꿈과 소망이 어우러진 별을 보며 걸어가고




[핵심 정리]

지은이 : 정지용(鄭之溶, 1902-?) 시인. 충북 옥천 출생. 6.25 때 행방불명. 섬세한 이미지와 잘 짜여진 시어로 1930년대를 대표하였다. 초기에는 이미지즘 작품을 썼고, 후기에는 동양적 관조의 세계를 주로 형상화하였다. 대표작으로는 ‘향수’, ‘유리창1’ 등이 있으며 시집으로는 <정지용 시집>, <백록담> 등이 있다.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감각적, 묘사적, 향토적

표현 : 참신하고 선명한 감각, 언어의 해조(諧調 잘 조화됨, 즐거운 가락)와 압축된  서정적 분위기, 토속적이고 원초적임

심상 : 고향에 대한 추억을 선명히 되살려 주는 감각적이고 향토적인 심상

어조 : 아련한 그리움에 젖듯이 차분한 어조

구성 : 확대 - 축소의 중첩 구조

   1-2연  평화롭고 한가로운 고향의 정경(외부 풍경)

   3-4연  겨울 밤 풍경과 아버지에 대한 회상(내부 풍경)

   5-6연  유년기의 회상(내면 공간)

   7-8연  누이와 아내에 대한 회상(외부 풍경)

   9-10연 고향에서의 귀가와 휴식(내부 풍경)

제재 : 고향의 정경

주제 : 고향에 대한 그리움

출전 : <조선지광> 65호(1927)




▶ 작품 해설

이 시는 농경 시대 한국인의 고향을 노래했다. 10개 연 중 홀수 연은 고향의 잊을 수 없는 심상을 제시하고, 짝수 연은 잊을 수 없는 감정을 동어 반복을 통해 강조하여 홀수 연의 심상들을 연결하고, 작품 전체에 통일성을 유지시켜 준다. 날로 도시화, 비인간화되어 가는 현대 사회,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옛 고향의 정취에 젖어 들도록 하기에 족한 시다.

우선 표현면에서 볼 때, 이 작품은 첫째, 토속적이고 원초적인 심상(‘실개천’, ‘얼룩백이 황소’, ‘질화로’, ‘짚베개’ 등)에 의해 고향의 정경을 재구성함으로써 그리움의 주제를 부각시키고 있다. 둘째, 공감각 및 감각의 전이(轉移) 기법을 통해 참신하고 선명한 시각적 표현을 보인다. 셋째, 아름다운 우리말의 해조(諧調)가 서정적인 분위기와 조화되어 고도의 압축된 시적 형상화를 이루고 있다.



각 연별로 시상의 전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2연은 청각적 심상과 공감각적 심상을 사용하여 평화롭고 한가로운 고향 마을을 둘러싼 공간을 원경으로 제시하고 있다.

3,4연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늙은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촌민(村民)들의 삶을 환기시키면서 잊지 못할 고향집의 심상을 드러내 주고 있다.

5,6연은 ‘내 마음’이라는 단어를 통해 시적 자아가 제시되기도 하는데, 여기에서 시적 자아는 아름다운 꿈과 신비로 가득 찬 유년 시절을 감각적 단어의 사용을 통해 회상하고 있다.

7,8연은 어린 누이와 아내의 모습을 통해 농가의 정경과 아낙네들의 소박한 인정을 회상하는 부분이다.

9,10연은 ‘하늘-성근 별’, ‘모래성’, ‘서리 까마귀-지붕’ 등의 어휘를 통해 고향의 정경을 드러내 주고 있고, ‘흐릿한 불빛, 도란도란거리는’의 단어를 통해 단란한 농가의 생활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정지용의 초기 시의 하나로서, 농경 시대 한국인의 고향에 대한 회상과 그리움을 주정적(主情的)으로 노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