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일 서정(秋日抒情)




김광균(金光均)




낙엽(落葉)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紙幣).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도룬 시(市)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瀑布)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 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 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을로 황량(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帳幕) 저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시어, 시구 풀이]

망명 정부의 지폐 : 가치 없고 초라하며 어수선하게 뒹구는 낙엽을 비유한 말

도룬 시(市) : 폴란드의 도시 이름

포화(砲火) : 총포를 쏠 때에 일어나는 불

일광(日光)의 폭포(瀑布) :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살

근골(筋骨) : 근육과 뼈대

철책(鐵柵) : 쇠붙이로 세운 울타리

셀로판지 : 비스코스로 만든 얇은 막질의 물질. 무색 투명하고 유리 모양의 광택이 있음.

황량(荒凉) : 황폐하여 쓸쓸함

낙엽(落葉)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紙幣). : 낙엽이 폴란드의 망명 정객들이 모여 만든 정부가 발행한 지폐처럼 무가치함. 무상감에 젖게 한다.

포플라 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 : 낙엽이 진 포플라 나무가지를 근골만 남은 형상으로 의인화하여 그 사이로 보이는 공장의 삭막한 풍경을 드러낸다.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 셀로판지는 가공된 것으로 존재의 가치가 가볍고 미미함을 드러낸다.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 쓸쓸한 가을 풍경을 대하는 서정적 자아의 심경을 드러냄. 무기력하고 하릴없어 돌팔매나 던지는 자신을 그려 내고 있다.




[핵심 정리]

지은이 : 김광균(金光均, 1914-1993) 시인. 경기 개성 출생. 심상파(心象派) 계열의 모더니즘 시인. 이상(李箱)의 다다이즘의 영향이나 김기림의 초현실주의적인 급진적인 요소보다 온건하고 차분한 회화적인 이미지에 치중함. 한국 서정시의 전통의 밭에 일차적으로 영미(英美)의 이미지즘을 접목시켰으며, 이탈리아의 미래파, 프랑스 상징주의를 수용했음. 시집으로 <와사등(瓦斯燈)>(1939), <기항지(寄港地)>(1947) 등이 있다.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시각적. 애상적

어조 : 쓸쓸하고 애상적인 어조

심상 : 시각적. 촉각적. 공감각적 심상

구성 :

   1연  쓸쓸한 낙엽의 모습

   2연  가을의 쓸쓸한 풍경

   3연  도시의 가을 풍경의 황량함

   4연  적막 속에서 고독을 느낌

제재 : 가을 풍경

주제 : 가을의 애수 어린 풍경과 고독감

출전 : <인문 평론>(1940)




▶ 작품 해설

이 시는 시각적 이미지를 독특한 비유를 통해 형상화시킨 이미지즘(imagism) 계열의 시이다. 이와 같은 회화적(繪畵的) 표현은 구체적 사물뿐만 아니라 관념이나 심리적 사상(事象)까지도 시각화된 이미지로 나타내고 있다. 특히, 사실적 서경(敍景)의 표현보다 일상적 관념을 깨뜨리는 낯선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 점에서 상상력의 비약과 지적인 인식을 요구하고 있다.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구겨진 넥타이’, ‘담배 연기’와 같은 비유는 근대화된 서구 도시 문명에 대한 관심의 표상이며, ‘나무’와 ‘공장’을 각기 ‘근골’과 ‘흰 이빨’과 같은 기계적, 물질적 이미지로 비유한 것은 사회의 근대적 변화에 대한 감수성을 보여 준 것이다.

1연은 낙엽으로 허무적 애상감을 드러냈다. 낙엽이 망명 정부의 지폐처럼 무가치하게 흩날리는, 폭격 맞은 도룬 시를 상상하게 한다.

2연은 적막한 길을 묘사한 부분이다. 고정체인 길을 비고정체인 넥타이의 구겨짐으로 묘사하면서 낮 두 시의 한적한 시간을 설정하였다.

3연까지가 이 시의 전반부이다. 전반부는 가을의 황량함을 드러냈는데, 나목(裸木) 사이의 도시의 황량한 풍경이 제시되어 있다.

4연은 선경후정(先景後情)의 구조로 이 시에서 후정(後情)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가을이 주는 황량함 때문에 마음을 잡지 못하는 무기력한 자아가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허공을 돌팔매나 던지며 황량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5연에는 모든 것이 기우는 황혼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결국 상황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자아로 설정되어 운명적으로 잠기어 가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참고> 김광균 시의 특징

김광균은 김기림, 정지용과 더불어 1930년대 모더니즘 시를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시인이다. 그는 특히 김기림이 지적했듯이, ‘소리조차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주’를 가지고 회화적인 시를 즐겨 쓴 이미지즘 계열의 시인으로 평가된다. 그는 도시적 소재를 바탕으로 공감각적 이미지나 강한 색채감, 이미지의 공간적 조형 등의 기법을 시에 차용하였으며, 특히 사물의 한계를 넘어 관념이나 심리의 추상적 차원마저 시각화시켰다. 그의 시 속에는 소시민적 서정과 문명 속에서 현대인이 느끼는 고독과 삶의 우수와 같은 정서가 깃들어 있다. 그의 작품 경향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도시적 소재와 공감각적 이미지를 즐겨 사용함, ② 이미지의 공간적인 조형을 시도함, ③ 강한 색채감으로 감각도 높은 정서를 형상화함, ④ 시각적 이미지를 중시하여 사물은 물론 관념이나 심리 등의 추상적인 것마저 그려 내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