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金芝河)




신 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 소리 통곡 소리 탄식 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내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 오는 삶의 아픔

살아 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 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시어, 시구 풀이]

신새벽 : 이른 새벽

호르락 : 호르라기

치떨리는 : 분노로 감정 상태가 격앙됨

신새벽 뒷골목 : 새벽이라는 시간상 밝음의 이미지와 뒷골목이라는 공간상 어둠의 이미지가 묘하게 교차되고 있다. 즉, 희망적 이미지와 자유스럽지 못한 이미지가 대비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 내 기억 속에 민주주의인 네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라는 뜻으로, 서정적 자아가 민주주의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토로하고 있는 표현이다.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 : 현실의 억압 때문에 잊고 있었던 민주주의에 대한 기억을 갈망의 힘으로 끈질기게 되새긴다는 표현이다.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 : 민주주의가 살아 숨쉬는 바람직한 사회의 구현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암시하고 있는 표현이다.

푸르른 자유주의 추억 : 민주주의 자유 시대에 대한 희망스런 기억. 자유 민주주의 실현 열망이 감각적으로 나타난 표현이다.




[핵심 정리]

지은이 : 김지하(金芝河, 1941- ) 시인.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필명 김형(金灐). 시대적 고뇌를 참여적 시각에서 구체화하였으며, 최근에는 생명과 환경에 관한 작품을 많이 쓰고 있다. 시집으로 <오적(五賊)>, <타는 목마름으로> 등이 있다.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참여시

성격 : 서정적. 저항적

어조 : 민주주의를 간절히 열망하는 목소리

심상 : 감각적. 비유적

구성 :

   1연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2연  시대의 억압 및 고통

   3연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

제재 : 민주주의

주제 : 민주주의 도래에의 강한 열망

출전 : <타는 목마름으로>(1982)




▶ 작품 해설

 이 시는 유신 체제의 질식할 듯한 억압 속에서 민주주의 회복의 열망을 절규한 1970년대 초의 기념비적 작품의 하나다. 가슴 속에 목마른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이른 새벽 뒷골목에서 남 몰래 써야 한다는 시적 상황 속에 당시의 현실이 선명하게 집약되어 있다.

 제 2연은 여러 가지 소리의 중첩을 통해 이 시대의 공포와 고통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발자욱 소리’에서부터 ‘탄식 소리’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구체적 사건의 서술이 없지만, 오히려 소리들 사이에 있는 무서운 사태가 독자들의 상상 속에서 생생하게 떠오르도록 한다.

 이 작품의 화자(話者)는 위와 같은 험한 상황에서의 분노와 비통함으로 흐느끼면서 뒷골목의 나무 판자에 ‘민주주의여 만세’라고 쓴다. ‘뒷골목’에서 ‘숨죽여 흐느끼며 / 남 몰래 /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 만세를 쓸 수밖에 없는 이 대목은 그 어떤 산문적 서술보다 뚜렷하게 당시의 정치적 현실을 증언하면서,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비장한 결의를 보여 준다.

시상의 전개 과정을 살펴 본다면, 우선 시인은 자유 민주주의 시대의 도래를 최고의 지향 가치로 생각하고 있다. 1연에서는 밝은 곳에서 떳떳하게 민주주의를 부르지 못하는 시대 현실이 암시되어 있는데, 오직 마음 속 갈망으로만 민주주의를 부르고 쓸 뿐이다. 2연에서는 억압 받는 사람들의 형상이 소리에 의해 구체화되고 있다. 서정적 자아의 가슴 속 깊이 억압의 상처가 스며드는 가운데 서정적 자아의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더욱 심화된다. 3연에서는 가슴 속 강한 열망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는 서정적 자아의 모습이 역력히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