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근 통신(木槿通信) - 일본에 보내는 편지
김소운 (金素雲)



친애하는 일본의 국민 여러분!



나는 대한민국의 총리도 국민 대표도 아닙니다. 포의 서생에 지나지 않는 일개인이 이런 전치사로 여러분을 부르는 것이 혹시 외람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20 몇 년이란 긴 세월을 귀국에서 자랐습니다. 우리 나라 말로 '잔뼈가 굵어지도록―' 20 몇 년이라면 당신네들이 '종전'이라고 부르고 우리가 소위 '해방'이라고 하던 1945년까지로 마감해서 내 생애의 거의 3분지 2에 해당합니다. 그렇게 긴 세월을 나는 귀국의 우로에 자랐습니다. 내가 가진 변변치 못한 지식이나 교양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 태반은 일본에서 얻어 온 것입니다.  

'친애'란 말이 일편의 외교 사령이 아닙니다. 진정 여러분에게 보낼 수 있는 내 마음의 인사입니다.  

나는 3,4일 전에 어는 친구 집에서 30여 년이 지난 헌 기록 사진 몇 장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기미 운동이라고 부르는 이른바 대정 8년의 '독립 소요 사건' 때 당신네들 손에 학살당한 그 처참한 송장들의 사진을 내가 그날 처음 본 것은 아닙니다. 20여년 전 토오쿄오 게라구 고우(東京下落合)의 오끼노 선생 댁 서재에서 본 것도 바로 이 사진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무에다 주렁주렁 목을 달아 메어 죽인 그 사진을 그 날 다시 대했을 때 내 감정은 새로 한 번 설레었습니다.  

'죽일놈들 같으니 ― 이 죄값으로도 나라가 안 망할라구!'

그 때 내 입으로 복받쳐 나온 말이 이것입니다. '왜적'이니 '강도 일본'이니 하는 말로는 형용치 못 할, 더 한결 절실한 미움이 용솟음친 것을 고백합니다.  

이 '미움'과 이 '친애'는 둘 다 에누리 없는 내 진실의 감정입니다. 이 서로 상반되고 모순된 두 감정을 그냥 그대로 전제해 두고 이 글 하나를 쓰자는 것입니다.  

지난해 가을 ---정확하게는 1950년 9월 10일호 [선데이 매일]지 권두에 <한국전선에 종군하여>란 좌담회 기사가 실렸던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좌담회라기 보다는 UP통신 특파원과 뉴스위크 부주필의 대담---. 거기다 [선데이 매일]의 사원 하나가 진행을 겸해서 한 자리 끼었으니 이를테면 세 사람의 정담(鼎談)회라는 것이 옳을는지요. 정담(鼎談)이든 대담이든 그것은 별문제로 하고, 도대체 기사의 내용이란 것이 어마어마 했습니다.

기탄없고 졸직한 점으로 보아 그 이상 바랄 수 없으리만치 한국의 약점을 찌른 명담이요, 쾌변이었습니다. 도시니 촌락이니 할 것 없이 왼통 구린내 천지란 이야기, 독와사(毒瓦斯)는 없어도 구린태에 코가 떨어지지 않으려면 와사(瓦斯)마스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 길거리에서 보는 거러지며 부랑아들 이야기--- "무슨 죄를 졌기에 이런 나라를 위해서 전쟁까지 해 주어야 하느냐?" "소련을 응징하는 것이 이번 전쟁의 목적이라면 차라리 이런 나라는 소련에 주어버리는 것이 더 효과적이 아니냐" 등등---, 정히 한국인의 심장에 비수를 겨누는 언언구구(言言句句) 대진리를 갈파한 주옥의 경구들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친애하는 일본 국민 여러분!  

내가 최근에 들은 바로는 [썬데이 매일]의 발행 부수는 70만에서 80만을 상회한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으로는 상상치도 못할 방대한 부수입니다. 한 부를 다섯 사람이 읽었다 치더라도 400만에 가까운 이 숫자는 거의 일본의 독서 대중의 총량에 해당할 것입니다. UP특파원과 뉴스위크 부주필이 두 분의 외국 기자는 한국의 똥구멍을 털어서 그 적나라한 실상을 전 일본의 방방곡곡에다 소개하고 선전해 주었습니다.  

거기 대해서 우리들은 정히 냉한삼두(冷汗三斗)일 뿐, 일언반사의 대구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물며 이것은 우리들이 역사의 은인이라고 부르는 미국의 언론인의 대담입니다. 그 기사의 책임을 여러분에게 돌릴 이유도 없거니와 그것을 여기서 추구하고 항변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날 가졌다는 것은 가난한 것과 초라한 것뿐입니다. 어느 모로 따져 보아도 우리가 치켜들어서 남의 앞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일찍이 남의 나라에까지 이식되던 우리들의 문화는 이미 낡은지 오래입니다. 그리고 그 문화의 대부분이 일본 ― 즉, 당신네들의 나라로 수출되었습니다. 새삼스런 이야기 같습니다마는 우리노(上野) 공원을 지나칠 때 여러분은 왕인 박사의 기념비를 자주 보실 것입니다. 일본에 처음으로 한문 문화를 이식한 우리 선인의 한 분입니다.

일본에 있어서 생활 문화의 기본이라고 할 '다도(茶道)'―, 지금도 일본의 여유층들은 비록 패전은 했다고 하나 그 다도를 숭상함이 예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 쓰이는 그릇(茶碗)들은 좀 값나고 귀한 것이라면 대개로 이 '구린내 나는 나라'의 출토품들입니다.

지나간 옛 문화가 아무리 찬란했기로서니 그것으로 오늘날의 우리의 처지를 호도할 구실은 못됩니다. '소로구―프'에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동물들의 자격 심사회인데 그 몇 번째 차례에 거위가 나왔습니다. 심사관이 묻습니다.  

"자네 공적은 무언가?"  

"네, 제8대조 할아버지가 트로이 전쟁 때 성을 넘어오는 적병을 맨 처음 발견했지요. 그래서 하마터면 위태할 뻔한 성을 구해냈답니다. 유명한 이야기이지요."

"그건 자네 8대조 이야기가 아닌가. 자네 공적이 무언가 말이야."  

"제 공적이 무어냐고요? 제가 바로 그 8대조 할아버지의 8대손이지요."  

"글쎄 이 사람아, 트로이 전쟁은 트로이 전쟁이고 자네는 대체 무엇을 했더냐 말이다."  

"온, 참, 말귀도 못 알아들으시네. 제가 바로 트로이 전쟁에 공훈을 세운 그 거위의 8대 직손이라니까요."

우리는 비록 구린내 나는 나라의 족속이라고 하나 이 거위의 '넌센스'를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신라니 고구려니 해서 죽은 아이의 나이를 헤자는 것이 아니라 일체를 상실한 오늘날과 그 화려하고 풍요하던 옛날의 문화를 한번 맞대어보는 것입니다.  

서글프고도 부끄러운 회상입니다.  

[선데이 매일]의 기자가 묻습니다.  

"한국의 도시나 촌락에서 약탈을 당한 그런 흔적은 없던가요."  

"글쎄요. 한국에 약탈을 당할 만한 무슨 재산이 애당초에 있었던가요. 그토록 빈한합니다. 이 나라는―"

UP기자의 이 대답에는 "약탈의 대상이나 되었으면 제법이게―"하는 또 하나의 암의가 풍기어 있습니다. 사실인즉 전화로 인해서 입은 직접 피해 외에도 한국의 국민들은 허다한 재산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재산'이라고 하는 물자며 세간살이들은 있는 이의 눈으로 볼 때 소꿉장난의 부스레기들로 보였을 것입니다.  

약탈의 대상도 못 되리만치 빈곤하다는 이 신랄한 비평을 그러한 의미에서 감수합니다. 그러나 관과치 못할 또 하나의 문제가 여기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은 36년 동안을 일본이 다스리던 나라입니다.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일본의 정치가 마침내 한국을 이 빈곤에 머무르게 했다는 사실은 별로 일본의 자랑이 못될 것입니다.  

―'센징(鮮人)의 주택은 더럽다'고 쓰는 것보다 '센징의 집은 도야지 우리 같다'고 쓰는 편이 문장 표현으로도 더 효과적이다 ―  

20년 전 동경 삼성당에서 발행된 교재서의 한 구절입니다. 현명하고 영리한 귀국 국민에도 제 욕을 제가 하는 이런 바보가 있었습니다. 이런 천진한 바보의 귀에도 약탈감도 못 된다는 외국 기자의 한국평이 통쾌하고 고소했을는지 모릅니다마는, 마음 있는 이는 아마 또 하나의 반성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국의 '레미제라블(悲慘)'은 한국의 수치이기 전에 실로 일본의 덕성의 '바로미터'이라는 것을―  

"한국에서 돌아와 일본을 보니 여기는 바로 천국이야. 한국은 정말로 지옥이지 "  

"전선에서 잠드는 UN 부대들의 야영의 꿈은 뉴―욕이나 갤리코니아가 아니거든― 긴자, 도―똔보리, 아사쿠사, 신쥬꾸―, 하나꼬상, 기미꼬상, 노부꼬상의 꿈이지."

패전국이라던 일본이 천국이요 36년의 질곡에서 벗어났다는 한국이 지옥이란 것은, '메퓌스트 회레스'와 '파우스트'가 위치를 전도한 것 같은 신통하고도 재미있는 후세의 이야기 거리입니다. 전쟁에 지면 사내란 사내는 모조리 아프리카로 끌려가서 강제 노동의 노예가 된다던 일본……. 그 일본은 점령군 사령부의 관후한 비호 아래 문화를 재건하며 시설을 다시 회복하여 착착으로 전쟁 전의 면모를 도로 찾아가고 있습니다. 거기 대비할 때, 연합국의 일원이요, 당당한 승리자인 중국은 그 광대한 영토를 버리고 대만으로 밀려가고, 해방의 기쁨에 꽝매기를 울리며 좋아 나루띠던 한국은 국토를 양단 당한 채 지난 1년 동안에는 두 번이나 수도 서울을 적수(敵手)의 유린에 맡기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사실, 가장 냉엄해야 할 '역사'도 알고 보니 익살맞고 짓궂은 장난꾸러기입니다.  

행여나 오해치 마십시오. 우리는 일본의 불행을 바라는 자가 아닙니다. 일본의 행복을 질시하는 자가 아닙니다. 비록 '지옥'의 대명사를 가지도록까지 일찍이 상상치도 못한 가난과 도탄을 겪고 있다고는 하나 그러나 우리는 지녀나가야 할 최후의 덕성하나를 쉽사리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는 이 장황한 편지에 결말을 지어야 하겠습니다. 일본에 대해서 너무 아는 체한 것이 부끄럽습니다마는, 그러나 하고 싶은 얘기를 이것으로 다한 것이 아닙니다. 원컨대 여러분들과 자리를 같이해서 한국과 일본이 지닌 이 구원(久遠)의 숙명에 대해서, 좀더 활발하게, 좀더 솔직하게, 흉금을 토로하고 싶습니다. 그런 기회가 아직도 내게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구원의 숙명 ― 진실로 그렇습니다. 미우나 고우나 이것은 숙명적인 인연입니다. 과거의 수천 년이 그러했고, 다가올 수만 년이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개인의 이웃은 떠나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민족의 이웃, 국가의 이웃은 떠나버릴 수 없고, 땅덩이를 실어서 이사할 수도 없습니다.  

한국이 오늘날 당면하고 있는 고난과 비통을 이미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쓰라림과 불행을 우리는 이미 겪어온 것 같습니다. 여기 대해서는 아름다운 말, 호기스런 장담으로 외면(外面)을 호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최후로 한마디 말을 덧붙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역경에 있어서 강한 민족이었습니다. 신라의 옛날은 모르거니와 고려의 문화, 이조의 학예가 한가지로 고난의 어둠 속에서 더 한층 빛났다는 것이 우리들의 자랑입니다.

우리의 과오 ― 나날이 우리 스스로가 불행을 자승(自乘)해 가고 있는 이 현실을 부정치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하나의 섭리를 믿는 자입니다. 사나운 바람, 매운 서리를 견디고, 땅속에 잠겼던 한 톨의 보리알이 움을 틉니다. 이것이 민족의 지열(地熱)입니다. 만일 이 지열이 없었던들, 우리는 몇 세기 전의 어느 국난에서 벌써 멸해 버렸을 민족입니다.

가미가제의 기적을 바라는, 이것은 신화가 아닙니다. 침략치 않고, 저주할 줄 모르는 어진 백성이, 오욕과 가난에 견디어 내는 하나의 항독소입니다.  

일전에 친한 미국인 한 분이 내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미스터 김! 그대가 만일 한국이 아니고 미국이나 프랑스에 태어났던들, 몇 배, 몇 십배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으련마는 ."

"천만의 말씀 ."  

그 때 내 입으로 나온 대답입니다.

"내 어머니는 '레프라'(문둥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어머니를 '클레오파트라'와 바꾸지 않겠습니다."  

"오오, 그러리라!"

그는 자못 심각하고 침통한 표정으로 내 손을 쥐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그날 내가 처음 한 것은 아닙니다.

1939년 11월호 《부인공론》에 '보오노 하나(박꽃)'란 수필 하나가 실려 있습니다. 향토에 대한 내 애정과 신앙을 고백한 글입니다.  

'향토는 내 종교였다 .' 거기 쓴 이 한마디 말은 목숨이 다 할 날까지 내 가슴에 지닐, 괴로우나 그러나 모면치 못할 십자가입니다.

문둥이의 조국! 그러나 내게 있어서는 어느 극락정토보다도 더 그리운 어머니의 품입니다.

  가마꾸라 하세의 내 살던 집에 무궁화 한 그루가 있습니다. 수필집 이름은 《목근의 뜰》이라 지었다가 그 책은 마침내 나오지 못한 채, 종전(終戰)되던 해 이월, 손가방 하나를 들고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육 년이 지났습니다.  

육군의 비밀 공장 기지로 들어가 그 집이 헐리웠다는 소식을 내가 떠난 월여 후(月餘後)에 들었습니다. 내 살던 집은 없어지고, 뜰에 썼던 무궁화도 지금은 아마 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흰 꽃 모습은 언제나 눈만 감으면 내 앞에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보내는 이 편지에 '목근통신'이라고 이름지은 쑥스러운 애상(哀傷)을 웃어 줍시사 하고 이 글을 끝맺습니다. (1951. 8. 부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