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하라, 예산의 추억이여!

창살을 감아 오른 나팔꽃의 파란 나팔소리를 들으며 잠을 깬 이른 아침.
창가 10여 송이의 나팔꽃이 저마다 나팔을 불어대며
오늘 하루의 일과를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가볍게 아침식사를 한 후 간밤에 챙겨둔 여행배낭을 메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한달 여 전부터 예고되었던 시낭송가 지도자 과정의 1차 이론 시험과 실기 평가,
청하문학회의 모임을 겸한 예산에서의 워크샵을 위해 1박 2일의 일정으로 떠나는 것이다.
미지의 장소에 대한 설레임과 평가시험에의 긴장감이 묘하게 교차하는 동안
버스는 어느새 집결 장소인 교대 앞에 도착하였다.

아직 이른 시간 때문인지 몇 사람만이 눈에 띄었고,
아름다운 그녀들은 싱그러운 7월의 여신 같았다.
기세등등한 불볕더위를 예견하듯 가로수 그늘에 숨어들어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매미들의 울음이 대단한 아침.
저 매미들의 울음처럼 오늘의 실기시험은 잘 치룰 수 있을까?
자못 걱정이 앞서는 건 피할 수 없었다.
한국시낭송가협회와 청하문학회, 서울 시단과 함께 하는 이번 워크샵을 위해
이른 아침을 활짝 열었던 사람들이 창가의 그 나팔꽃처럼 웃으며 오고 있었다.
정겨운 인사를 건네는 동안 일행들은 다 모였고, 우리를 위해 대기해 있던 4륜마차는
예산으로, 예산으로 갈기를 휘날리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성기조 선생님, 이수하 선생님, 김문중 선생님의 인사말씀 후
우리는 제각기 자리에 앉아 이론 평가의 메모를 펼쳐놓고
몇 시간 후 다가올 시험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수십 년 전의 아련한 그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
시험공부를 하는 사뭇 진지한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여느 단체 여행에서 보아오던 노래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팽팽한 긴장만이 감돌 뿐이었다.
가끔 창밖을 바라보며 만나는 그 싱싱한 초록의 풍경들과 눈을 맞추며
공부하는 동안 목적지는 가까워 오고 있었다.

드디어 예산 땅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제일 먼저 맹사성의 고택을 둘러보았다.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고택을 보며
그 옛날 맹사성의 삶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맹사성의 묘가 내가 사는 고장 광주에 있어서
그 어른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한적한 고택의 빈 마당에 홀로 서 보니 시간을 거슬러
조선의 여인이라도 된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버스에 올라 목적지인 예당호로 향했다.
긴 시간을 달려온 피로감도, 찌는 듯한 무더위도, 모두 시험의 긴장 속에 묻어두고
우리는 모두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방을 배정받고 우리는 임시로 정해진 번호순으로 낭송 실기평가를 받았고,
연이어 필기시험 문제를 받아 들고 답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 순간의 기묘한 긴장감은 두고두고 재미있는 후일담거리로 아껴두기로 한다.  

시험을 모두 끝내고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예당호숫가 공원으로 내려갔다.
흐린 날씨 탓에 거대한 예당호의 모습이 조금은 돋보이지 않았다.
예산 청하문학회 회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큰 솥에 정성껏 끓인
50인분의 삼계탕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날은 마침 중복이라 삼계탕을 준비했다는데, 그 정성 덕분인지 삼계탕은 정말 맛있었다.
먹는 동안 온 몸엔 땀이 줄줄 흘러내렸고, 시원한 수박을 후식으로 먹었지만
그 땀을 어찌 다 씻을 수 있으랴.



식사 후 자리를 정리하고 바로 옆에 위치한 야외무대로 자리를 옮겼다.
시간은 어느 덧 다섯 시를 넘겼지만 폭염의 기세는 쉽게 누그러지지 않았고,
이어지는 행사를 준비하는 동안 우리들은 비로소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객석의 곳곳에서 하나 둘 피어나는 이야기꽃은 서서히 물들어 가는 노을과 함께
한여름 밤의 향연을 맞이하고 있었다.

드디어 행사가 시작되고 성기조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분들의 인사말이 있은 후,
백양문학,청하문학회와 서울시단의 시낭송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이어 2부에서는 우리 시낭송가협회 회원들의 낭송과 장기자랑이 펼쳐졌다.
시험의 긴장에서 풀려난 탓인지 낭송은 평소 때 보다 훨씬 성숙하고 안정적이었다.
행사를 구경하려고 사람들이 하나 둘 몰려들었지만, 곳곳의 빈 객석이 못내 안타까웠다.
더운 날씨 탓도 있겠지만, 좀 더 홍보를 하여 이런 문화행사를 함께
공유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컸다.
밤이 깊어 갈수록, 행사의 열기는 고조되어 모두들 들떠 있었다.
예로부터 가무를 즐기던 우리 민족의 얼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우리들이기에
그 밤이 더욱 흥겨웠을 것이다.



자정이 가까울 무렵, 행사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왔다.
모두들 땀을 씻어내고 편안한 복장으로 큰 방에 둘러앉아 그 날의 일정을 이야기 하고
앞으로 시 낭송가로서 행해야 할 바람직한 모습에 대한 김문중 회장님의 말씀을 듣고
서로 좋은 의견을 내며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하는 토론시간도 참 좋았다.
성숙한 토론을 토대로 하여 발전되어 왔던 인류의 역사인 만큼 이러한 토론은
본 시낭송가협회의 많은 발전을 가져오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겼지만 그 진지함에 모두들 눈동자는 더욱 빛나고 있었다.
얼마 후 여장을 챙겨들고 각자 배정된 방으로 옮겨서 휴식에 들어갔다.
우리 방이 그랬듯 다른 방에서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더 오래도록 이어졌을 것 같다.

다음 날 다소 이른 기상으로 예당호를 다시 둘러보았고 자리를 옮겨 아침식사를 한 후 우리는 일정대로 먼저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소를 찾았다.
마을 어귀의 비석 앞에서 성기조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묘소로 올라가 보니
그 곳은 정말 명당인 것 같았다.
가슴이 탁 트이는 시야를 바라보며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고,
일상의 번민들도 발 아래 저 멀리로 날려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곳의 정기까지 듬뿍 넣어 찰칵찰칵 기념사진에 담고 묘소를 내려왔다.



다음은 서산의 마애삼존불을 만나러 가는 길.
작은 내를 건너 협소하고 가파른 돌계단을 밟아 올라가니 가파른 벼랑 옆에
삼존불은 평화롭고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맞아 주었다.
참으로 편안한 저 미소로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씻어 주었으리라.
그 미소를 닮아보려 나도 약간은 입꼬리에 힘을 주어보는 내 자신이
어린아이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절벽의 위쪽엔 돌틈 사이에서 자란 소나무 한 그루가
의연히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얼마 전 신문에서 보니 그곳 마애삼존불이 손상되어가고 있다는 기사에 마음이 아팠다.
천년 세월을 지켜온 삼존불의 미소가 영원하기를.
내려오는 길에 냇가에서 손발을 씻고, 주머니에서 달강대는 작은 미련 하나도 씻어 내렸다.



다음은 마지막 목적지인 예산 수덕사를 둘러볼 차례다.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 탓이었을까. 한번은 꼭 가보고 싶던 사찰이었다.
버스에서 수덕사 입구의 한정식 집에서 우리 일행에게 점심을 대접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성기조 선생님의 지인으로부터 그런 전화를 받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곳에 도착하여 참으로 맛깔스러운 점심을 먹었다.
식사 후 우리는 서둘러 수덕사로 올라갔다.
잘 정돈된 도량을 둘러보고, 법당 오른쪽에 수많은 하얀 지등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고 법당에 들어서 삼배를 올렸다.
이마엔 땀이 솟았고, 가슴엔 그 동안 잠잠했던 불심이 솟아올랐다.  

꼭 삶이 바쁜 탓만은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사찰을 찾는 횟수가 뜸해지고,
내 젊은 날을 온통 휘어잡던 불심은 헤실바실 사라져버리지 않았던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나의 우매한 의구심에 부처님은 지난 날의 그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계실 뿐이었다.
법당을 나서자 처마 끝에 매달린 꼼짝 않는 풍경이 나의 게으름에 일침을 놓아주었다.
일주문에서 예를 올리고 돌아서는 발걸음은 한발 한발이 참으로 조심스러웠다.



우리는 다시 귀경하는 버스에 올랐고, 시원한 냉방차에서 마음을 다독였다.
이번 행사에 애써 주신 선생님께 선물을 마련해 드리고, 맛있는 자두를 먹으며
올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차안은 흥분되어 가고 있었다.
고경자 님의 재치 있는 진행으로 우리는 폭소를 연발하며,
시험 때문에 받았던 긴장감과 스트레스를 휘리릭- 날려버렸다.
우리들도 다 겪어온 과정이었지만 내 아이들의 시험의 부담감을
좀더 속 깊이 이해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는 길은 내내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1박2일 동안 행사를 위해 애쓴 모든 회원들과 선생님께 갈채를 보낸다.
이 나라 곳곳에서 낭송문화를 꽃 피우는 진정한 낭송인이
우리 낭송가협회에서 많이 탄생하기를 바라며 후기의 마침표를 찍는다.
(2005. 8.   )